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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시민 혁명’ 앞에 선 대통령, ‘질서 있는 퇴진’ 결단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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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추위도, 눈발도 분노한 민심 앞에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지난 주말 190만 명(주최 측 추산)이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며 운집한 촛불시위는 세계사에 길이 남을 성숙하고 명예로운 시민 혁명의 극점을 보여 줬다. 특히 사상 처음으로 청와대 코앞 200m까지 밀어닥친 시위대의 함성은 민성(民聲)에 귀를 막고 버티기로 일관해 온 박 대통령에게도 똑똑히 들렸을 것이다.

이제 박 대통령은 더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한 주’를 맞았다. 야권은 박 대통령 탄핵을 이르면 나흘 뒤인 다음달 2일, 늦어도 열흘 뒤인 다음달 9일에 단행하기로 했다. 새누리당에서도 탄핵에 찬성하는 의원이 40명을 넘겨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할 가능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버티고 있다. ‘촛불은 시간이 지나면 꺼질 것’이란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라면 오판도 이런 오판이 없다. 지난 5주간 타오른 촛불은 빼앗긴 주권을 회복하려는 국민의 혁명적 외침이다. 일개 사인(私人) 최순실과 국정 최고책임자 박 대통령이 한 몸이 돼 국정을 농단한 전대미문의 국치(國恥)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단죄하고, 이런 초대형 범죄를 가능케 한 앙시앵 레짐(구체제)까지 총체적으로 개혁하라는 민심의 역사적 요구인 것이다.

박 대통령이 촛불에 담긴 이런 엄중한 국민의 뜻을 외면하고, 요행수를 바라며 시간벌기용 배수진을 친다면 결과는 파국일 뿐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주 검찰이 자신을 국정 농단의 주범으로 규정하자 변호사를 통해 ‘인격살인’ 같은 막말을 퍼부으며 비난하고, ‘수사에 협조하겠다’던 대국민 약속마저 뒤집어 버렸다. 자신이 그렇게 중용해 온 검찰의 수사 결과마저 거부하는 자가당착과 적반하장의 행태에 민심의 분노가 가중된 건 당연하다. 그제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4%까지 떨어진 이유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느냐”며 버티고 있다니 기가 차다.

박 대통령에겐 이번 주가 사실상 마지막 기회다. ‘헌정 사상 탄핵당한 첫 대통령’이란 오명을 쓰고 싶지 않다면 1차 탄핵 데드라인인 다음달 2일 전에 ‘사퇴 예고’ 선언을 해야 한다. 본인의 불명예 이전에 나라를 생각해서라도 용단을 내려야 한다. 탄핵은 헌법재판소의 최종 결정까지 최장 6개월이 소요돼 국정 공백의 장기화와 정치적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 따라서 박 대통령은 이번 주 중 대국민담화를 통해 구체적인 날짜를 하야시점으로 제시해야 한다. 그러면 탄핵이란 최악의 사태를 피하면서 여야 잠룡들이 대선을 준비할 시간을 벌 수 있다. 대선까지의 국정도 국회가 추천한 책임총리가 관리해 혼란을 최소화할 길이 열린다. 이홍구 전 총리 등 원로들도 27일 시국회동에서 내년 4월까지 하야할 것을 촉구하지 않았는가.

이마저 거부한다면 박 대통령은 탄핵 절차에 의해 강제로 쫓겨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불행한 사태를 피하는 길은 대통령 본인의 결단에 의한 ‘질서 있는 퇴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