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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희망의 미국기업, 절망의 한국기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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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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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미국 증시는 트럼프 당선을 악몽으로 여겼다. 다우지수가 평균 11% 곤두박질할 것이라는 ‘트럼프 탠트럼(발작)’이 대세였다. 월스트리트는 “트럼프는 인간 그 자체가 악재”라고 저주했다. 경제를 말아먹는다는 것이다. 실제 트럼프가 당선되자 일본 닛케이지수는 5.36% 폭락하는 발작을 일으켰다. 하지만 뉴욕 증시는 멀쩡했다. 험한 꼴은커녕 그날 다우지수는 1.4%나 올랐다. 트럼트가 1조 달러를 인프라에 쏟아붓고, 법인세도 35%에서 15%로 내리는 게 호재라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챈 것이다. 요즘 미 증시는 주가지수가 연일 사상 최고치를 뚫는 ‘트럼프 랠리’에 환호하고 있다.

미국이 부러운 대목은 두 가지다. 하나는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이다. 힐러리의 팬인 그는 트럼프를 헐뜯었다. 트럼프의 카지노호텔이 파산한 과거까지 들추며 “원숭이가 투자해도 트럼프보다 나았을 것”이라 비난했다. 그런데 트럼프가 이겨버렸다. 버핏은 줄을 서도 한참 잘못 선 것이다. 한국 같으면 ‘세무조사+검찰 수사’의 ‘종합 보복세트’로 죽어도 몇 번은 죽었을 운명이다. 하지만 버핏은 멀쩡하다. 오히려 떼돈을 벌었다. 트럼프 당선 이후 버크셔 해서웨이의 주가가 치솟아 13조원이나 챙긴 것이다.

또 하나는 애플이다. 트럼프와 애플의 CEO인 팀 쿡은 불편함을 넘어 원수지간이다. 이민·유색인종을 지지해온 쿡은 힐러리 모금행사를 주도했다. 트럼프는 “애플이 중국 공장을 미국으로 옮기지 않으면 아이폰에 45%의 관세를 물리고 나는 삼성 제품만 쓰겠다”고 협박했다. 그 후유증 탓일까. 쿡은 트럼프가 당선되자 패닉에 빠진 애플 직원들에게 e메일 메모를 보냈다. “…이번 대선 결과에 격한 감정을 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마틴 루서 킹 목사를 인용하며)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다독였다.

대선 직후 트럼프와 쿡은 전화통화를 한 뒤 그 내용을 공개했다. 트럼프는 “중국 공장과 일자리를 미국으로 가져오라. 애플이 해외에 보유 중인 215조원의 현금을 미국으로 가져오면 35%의 세금을 10%로 깎아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대해 쿡은 “이해한다”고만 했다. 하지만 애플은 심각하게 고민하는 눈치다. 현금 반입의 경우 지난 9월 유럽연합(EU)에서 세금 20조원을 추징당한 탓에 트럼프의 세제 혜택을 진지하게 저울질하고 있다. 중국 생산 라인의 일부를 미국으로 옮기는 방안도 비밀리에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미국은 정치가와 기업이 싸울 때는 싸우면서 정중한 거리를 유지한다. 중요한 이야기는 공개적으로 터놓고 주고받는다. 반면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재벌 총수 7명과 몰래 독대하면서 미르·K스포츠재단에 성의를 표시하라며 손을 벌렸다. 검찰에 따르면 경제수석은 원활한 수금을 위해 ‘그룹별 당면 현안 자료’를 깨알같이 챙겼다고 한다. 그렇게 입금된 돈이 774억원이다. 요즘 최순실 사태에 휘말린 한국 기업들의 신세는 말이 아니다. 롯데는 1년 넘게 쑥대밭이고, 삼성은 보름 동안 세 차례나 압수수색을 받았다. 곧 대기업 총수 9명은 국회 국정조사에 소환된다. 비단 국민들만 ‘순실증’에 빠진 게 아니다. 말할 수 없는 참담함과 무력감에 국내 대기업들도 집단 우울증을 앓고 있다.

트럼프와 박 대통령이 기업을 보는 시각은 전혀 딴판이다. 트럼프와 미국 기업들은 시대적 화두인 리쇼어링(re-shoring·해외 공장의 본국 회귀)과 4차 산업혁명을 놓고 통 큰 거래를 주고받고 있다. 이에 비해 박 대통령은 기업을 현금출납기로 여겼다. 검찰은 얼마 전까지 청와대 편에 서서 대기업 압박에 동원되더니, 이제는 거꾸로 미르·K스포츠재단에 돈을 댔다며 기업들을 혼내고 있다. 정신없이 얻어 맞는 기업들은 절망하고 있다. 경영하려는 기업가정신마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과연 미국 트럼프 랠리의 비결은 무엇일까. 영국은 어떻게 브렉시트 후유증을 딛고 유럽에서 ‘나홀로 성장’을 할까. 과감한 세금 인하와 재정투자 확대·리쇼어링으로 기업과 근로자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은 게 공통분모다. 지금 한국 기업들은 바로 그 희망을 잃고 있다.

이철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