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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내 것’인 적 없는 내 삶이여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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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7호 14면

엘프리데 옐리네크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한 대학생과 대화를 하다가 문득 등골이 서늘해진 적이 있다. “지금까지는 항상 모범생으로 살아왔거든요. 엄마가 시키는 대로 살아온 거나 마찬가지예요. 심지어 친구도 엄마가 정해 줬어요. 엄마가 ‘쟤랑 놀지 마’라고 한 아이랑은 차마 친하게 지내지 못하겠더라고요. 옷을 고를 때도, 문·이과를 선택할 때도, 대학을 선택할 때도, 학과를 선택할 때도, 항상 엄마와 의논해서, 아니 엄마가 원하시는 대로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엄마가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라고 하시니까 적응이 안 돼요. 제가 하고 싶은 것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어요. 뭐가 제 마음대로 사는 거죠? 제 마음이라는 게 정말 있기는 한 걸까요?”


가만히 듣다 보니, 그와 비슷한 고민은 비단 마마보이들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한참 동안 진짜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어떻게 해야 내 삶은 진정 ‘내 것’이 될 수 있을까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이 바로 심리학의 과제이고 인문학의 화두다.


[피아노만 알던 에리카에게 나타난 미남 클레머]

영화 ‘피아니스트’의 한 장면

부모들은 아이들의 ‘중2병’ 그러니까 유난스럽게 반항적인 사춘기를 걱정하지만, 사실 이는 아주 정상적인 발달 과정이다. 부모님이 뭔가를 잘못해서 반항하고 싶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세상 모든 것이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특히 어른들의 말을 듣는 것이 귀찮아지고 기성 질서에 반항하는 사람들은 다 멋있어 보이는 때다. 이런 반항기를 제대로 겪은 사람들이 오히려 나중에 방황에 대한 마음의 면역력을 키울 수 있다. 이 시기는 남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리는 ‘사회화’에 저항하는 시기이며, 점점 나만의 인격과 성격을 갖추는 ‘개성화’를 향해 마음의 닻을 내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나치게 엄격하거나 자기중심적인 부모 슬하에서는 이런 사춘기의 자연스러운 방황조차 사치가 되어 버린다.(70)의 『피아노 치는 여자』(국내 상영 제목 ‘피아니스트’)의 주인공 에리카가 그런 경우다.


에리카는 겉보기에는 빈틈없이 완벽해 보인다. 연주자들의 꿈이라 할 수 있는 오스트리아 빈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는 교사다. 하지만 그녀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짙은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애인도 친구도 없으며 이렇다 할 ‘마음 둘 곳’도 없다. 에리카의 어머니는 아직도 정해진 스케줄표에 따라 딸의 모든 행적을 추적하고 관리한다.


어머니는 에리카를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만들기 위해 세상살이의 모든 북적거림으로부터 딸을 격리시켜 왔다. 에리카의 삶은 마치 오선지 위의 피아노 악보처럼 잘 짜여 있다. 피아노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인조인간처럼 훈육돼 왔다. 어떤 열망이나 감정, 충동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교육받아 왔다. 정신질환을 앓던 아버지는 아내에게도 딸에게도 그저 투명인간 같은 존재였으며, 딸에게 가난과 무력감만을 물려주었다.


세상에 오직 둘뿐인 듯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모녀 앞에, 어느 날 눈부신 미남 클레머가 나타난다. 이 제자는 스승 에리카에게 지적인 호기심을 느낀다.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독특한 인간형이었던 것이다. 음악계에서 성공하고 싶었던 클레머는 자기보다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에리카를 유혹함으로써 성취욕을 느끼고 싶어 했고, 사회적으로는 유능했지만 인간으로서는 지극히 미숙한 에리카를 성숙한 인간으로 만들 수 있다고 느끼기도 했다. 에리카를 향한 클레머의 열정은 얼어붙은 그녀의 삶에 온기를 불어넣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에리카는 클레머의 열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 번도 누군가를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서 좋아해 본 적이 없는 에리카는 사물을 소유하는 것과 인간을 사귀는 것 사이의 차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클레머가 에리카를 유혹할 때마다, 에리카의 몸은 오히려 딱딱하게 굳어 버린다. 그녀는 한 번도 자기 몸의 진정한 주인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 몸을 던져 타인과 하나 되는 사랑의 행위가, 그녀에게는 낯설고도 무서운 자기포기로 다가온다.


에리카는 어머니라는 이름의 감옥을 그토록 저주하면서도, 상처받을 때나 슬플 때나 절망할 때나, 변함없이 어머니에게로 다시 돌아간다. 그녀는 한 번도 ‘어머니’라는 관제탑 없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 그녀에게 어머니 아닌 다른 타인의 육체는 너무도 낯설고 공포스러운 대상이다. 어머니는 에리카가 옷이나 구두, 액세서리도 사지 못하게 하는데, 그것은 남자들이 에리카에게 시선을 두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딸이 오로지 ‘나만의 에리카’가 되기를 바랐고, 그 계획은 성공했다. “우리끼리만 살면 되는 거야, 에리카. 우리 둘만 있으면 다른 사람은 필요 없지 않니?”


[어떤 고통도 당연하게 여기면 안 돼]


이런 에리카에게 유일하게 현실적인 감정은 고통이다. 그녀는 즐거움이나 행복, 희열이나 만족 같은 것을 알지 못한다. 오직 연습, 또 연습을 반복하며 ‘어머니에게 만족스러운 딸’이 되기 위해 노력해 왔던 그녀에게, 삶은 무지갯빛 다채로움이 아니라 회색빛 고통으로만 채워졌다. 그녀가 욕실에서 아버지의 면도칼로 자신의 몸을 자해하는 끔찍한 습관을 가지게 된 것도, 바로 ‘고통’을 통해서만 간신히 살아 있음을 느끼는 감각의 중독 때문이다. 그녀에게 유일하게 긍정적인 감각은 바로 타인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느낌이다. 그녀는 그것이 사랑이라 착각한다.


클레머가 자신을 육체적으로 지배하려 하자, 에리카는 마치 군대의 지휘관이 이제 막 입대한 병사를 다루듯 자신이 관계의 주도권을 쥐려 한다. 그녀에게 사랑은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사이의 통제를 의미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에리카는 클레머에게 자신을 꽁꽁 묶어달라고, 더욱 고통스럽게 해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한다. “나를 무자비하게 다뤄 줘!” 하지만 에리카는 바로 그렇게 ‘지배당하는 것’조차 그녀의 의지대로 통제하려고 함으로써, 상대와 진정으로 교감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에리카는 자신의 몸을 자해할 때만 ‘자신에 대한 통제권’을 제대로 행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에리카를 보면서 고통스러운 의문에 빠졌다. 왜 어떤 사람은 고통을 진심으로 즐길까? 심리학자 베셀 반 데어 콜크는 『몸은 기억한다』에서 “신체는 모든 종류의 자극에 적응하는 법을 배운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이 설령 끔찍한 자극일지라도. 한증막의 뜨거운 온도라든지 마라톤할 때의 엄청난 숨 가쁨처럼, 처음에는 공포를 유발하는 경험이 나중에는 점점 쾌락으로 전이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몸을 한계로 밀어붙이는 경험이 처음에는 고통이지만 어떤 임계점을 넘어가면 짜릿한 쾌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심지어 자신을 때려 줄 사람을 고용하거나 자기 몸을 스스로 해하는 사람들, 자신을 해치는 사람에게만 끌리는 사람들은 바로 그 강렬한 감정 뒤에 찾아오는 기이한 쾌감을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더 강렬한 자극을 원하는 것은 결코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육체적인 고통을 통해 정신적인 고통을 망각하는 이런 자해 행위는 결국 자신의 진짜 문제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어떤 아픔이 우리를 공격해도 결코 고통에 둔감해지거나 고통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자. 그 모든 아픔이 그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내 인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겪는 고통임을 알아차린다면, 우리가 저마다 겪는 아픔이야말로 인생의 첫 번째 자산 목록 1호가 되지 않을까. 고통마저도 내면의 성장을 위한 아군으로 삼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심리학적으로 건강하며 강인한 사람일 것이다. ●


정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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