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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욕먹는 자리…나서는 변호인 없어 재직 때 참모가 맡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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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검찰 수사받은 전·현직 대통령의 변호사들

대통령의 변호사. 그들은 직업적인 숙명으로 대통령이 위기일 때 나타나야 했다. 탄핵 위기에 내몰린 박근혜 대통령의 변호인은 유영하(54) 변호사였다. 지난 15일 선임된 그는 같은 날 서초동 서울고검청사 앞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법리검토를 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며 검찰의 대면 조사 연기를 주장했다. 이 발언은 사실상의 특혜 요구로 비춰지면서 여론이 악화됐고, 야당은 물론 친박계 의원들 사이에서도 “굳이 저런 발언을 공개적으로 할 이유가 있는 건가”라는 말이 돌았다. 특히 유 변호사는 “대통령이기 전에 여성으로서의 사생활이 있다”는 발언으로도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전두환 변론, 사정수석 출신 이양우
철벽 변호…부장검사가 “잘한다” 찬사
노태우 변론, 민정수석 지낸 한영석
“수사기록 안 보여줘” 언론에 호소
노무현 변론, 비서실장 역임 문재인
“예의 안 지켜” 우병우 중수1과장 비판
박근혜 변론 ‘숨은 진박’ 유영하
“대통령도 사생활” 발언해 여론 뭇매

유 변호사는 지난 4·13 총선 공천에서 새누리당 강세 지역인 서울 송파을에 단수 추천을 받으며 숨은 ‘진박’(진짜 친박)으로 지목받은 인물이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 변호인까지 맡으면서 진박 이미지가 더욱 굳어지게 됐다. 익명을 요구한 친박계의 한 중진 의원은 “요즘 변호사가 2만 명이나 되는데 굳이 진박으로 불리는 인물을 선임해 불필요한 오해까지 받을 필요가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욕 먹는 직업’. 변호사들은 자신들의 직업을 자조적으로 평가할 때 이런 말을 쓴다. 게다가 대통령의 변호사가 되면 유 변호사처럼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여론의 심판을 받기도 한다. 변호사 출신인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박 대통령보다 더욱 무거운 혐의를 받고 있는 피의자의 의뢰가 들어와도 일단은 받아야 하는 게 변호사의 숙명”이라며 “유 변호사 또한 대통령의 변호인이라는 부담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사건을 맡았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역대 대통령도 정치적 위기에 몰리면서 자신에 대한 검찰의 공세를 방어하기 위해 변호사를 선임해야 했다. 전·현직 대통령 관련 사건은 대기업 오너 일가에 대한 수사보다도 더욱 큰 주목을 받지만 수임료는 이에 비하면 형편없다는 게 변호사 업계의 공통된 설명이다. 이래저래 나서는 변호사가 없어 과거 대통령들도 주로 자신의 재직 시절 핵심 참모를 변호인으로 선임했다.

‘12·12 및 5·18 사건’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변호인은 청와대 사정수석비서관으로 함께 일했던 이양우(84) 변호사가 맡았다. 당시 이 변호사는 1996년 열린 전 전 대통령의 공판에서 ‘철벽 변호’를 한다는 평가를 들었다. 특히 그해 7월 열린 한 재판에서 “12·12사태 발생 후 전두환으로부터 (이 사건에 대해) 어떤 보고도 받은 바 없다”는 당시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의 진술에 대해 녹음테이프 자료를 제시하며 반박했다. 그리고 결국 윤 차장으로부터 “보고받았다”는 진술을 이끌어 냈다. 1979년 보안사령관이었던 전 전 대통령의 반란 범죄 증거 중 일부 내용들을 이런 방식으로 방어한 것이다. 당시 중앙일보(96년 7월 5일자 3면)는 “부장검사가 ‘정말 잘한다’는 찬사를 보낼 정도였다”고 보도했다. 전 전 대통령은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 변호사는 2003년 전 전 대통령에 대한 재산 추징 과정에서 ‘29만원이 나의 전 재산’ 발언이 논란이 됐을 때도 대변인 역할을 했다. 당시 이 변호사는 “실제 재산 총액이 8억8000만원인데, 예금·채권의 합인 29만1000원 부분만 전 재산인 것처럼 과장 보도되고 있다”고 해명했다. 이 변호사는 현재 사무실 운영을 접고 은퇴한 상태다. 그는 최근 통화에서 “현업을 떠난 지 오래된 사람에게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느냐”고만 했다.

12·12 및 5·18 사건에서 전 전 대통령과 함께 구속 기소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변론은 한영석(78) 변호사가 맡았다. 한 변호사는 노 전 대통령과 같은 대구 출신으로 재임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냈다. 95년 12월 열린 첫 재판에서 노 전 대통령이 비자금 장부를 파기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재판이 끝난 뒤 한 변호사는 기자들에게 “노 전 대통령이 비자금 장부를 파기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 법정에서 적잖이 당황했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범죄와 관련한 증거 인멸은 법원의 판단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게 돼 있다”는 법리를 설명한 뒤 “큰 걱정은 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는 방식으로 노 전 대통령을 감쌌다. 한편으론 “첫 공판일 전까지도 검찰이 변호인에게 수사기록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불만도 언론에 알리며 우호적인 여론을 만드는 데도 애썼다. 한 변호사는 현재 서울의 한 법무법인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비서를 통한 통화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각종 대선 주자 여론조사에서 1~2위를 기록하고 있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대통령의 변호사 출신이다. 그는 2009년 ‘박연차 게이트’ 사건에 연루됐던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인을 맡았다.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을 지낸 노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다. 그가 그해 4월 대검 중수부 조사실에 노 전 대통령과 함께 들어가는 모습은 당연한 것으로 비춰졌다.

그때 문 전 대표가 노 전 대통령과 함께 맞닥뜨린 검사는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었다. 문 전 대표는 2011년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 『운명』에서 우 전 수석을 ‘중수1과장’으로만 언급했다. 그러면서 “아무 증거가 없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박연차 회장과) 대질을 시키겠다는 검찰의 발상 자체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는 표현으로 우 전 수석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이처럼 과거 대통령의 변호사들은 수사·재판 중엔 정치적 표현을 최대한 삼갔다. 노련한 방식으로 여론을 다독였고 법적으로 대통령을 옹호했다. 하지만 유영하 변호사는 지난 20일 검찰의 최순실씨에 대한 수사 결과 발표에서 박 대통령을 공범으로 판단한 부분에 대해 “법정에서 한 줄기 바람에도 허물어지고 말 그야말로 사상누각(沙上樓閣)”이란 말로 비판했다. 새누리당 소속으로 지난 총선에 출마했던 정준길 변호사는 “변호사로서 의뢰인을 위해 법률적 반박을 하는 게 아니라 정무적 대변인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박상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과거 대통령 변호인들이 국민의 감성을 자극하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며 “박 대통령에게 유리한 방식의 대응이 무엇인지에 대한 판단이 일반인들과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클린턴 ‘르윈스키 스캔들’ 변호인 켄들, 힐러리 e메일 사건도 맡아

한국에서도 유명한 미국 대통령의 변호사는 데이비드 켄들(72·사진)이다. 켄들은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1998년)에 터진 ‘르윈스키 스캔들’의 변호인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미국 인디애나주에 있는 와바시 대학과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워싱턴 DC의 한 로펌에서 일하던 켄들은 93년 ‘화이트워터 게이트’ 사건 때 클린턴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었다.

클린턴이 아칸소주지사 재임 당시(79~92년) 친구와 공동 운영한 부동산 개발 회사 화이트워터와 관련해 은행에 압력을 넣어 대출금을 과도하게 받았다는 의혹에 대한 수사가 벌어지자 켄들이 변호인으로 선임된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수사는 특검으로 이어져 ‘르윈스키 성추문 스캔들’로 번졌고, 켄들은 계속 변호인으로 클린턴을 감쌌다. 수사 정보가 언론에 보도될 때마다 켄들은 “또다시 불법적이고 당파적인 의도로 수사상 기밀을 누설했다”며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를 공개 비난하기도 했다. 결국 클린턴은 화이트워터 사건에서 무혐의를 받았고, 르윈스키 사건으로 빚어진 의회의 탄핵안도 부결되면서 정치적 위기를 넘겼다.

켄들은 힐러리 클린턴의 변호인 역할도 수행해 사상 첫 부부 대통령의 변호사가 될 뻔했다. 힐러리는 지난 대선 때 국무장관 재임 중(2009~2013) 공식 메일 외에 사설 e메일 서버를 이용해 국가기밀을 다룬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는데, 이 사건의 변호인도 켄들이었다.

  최선욱 기자 isotop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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