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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시력 잃은 국가대표 사연 라디오서 듣고 시나리오 만들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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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유영아 작가가 말한 영화 캐릭터

장르를 넘나들며 탄탄한 극본을 내놓는 유영아 작가. 그는 “‘1만 시간의 법칙’이란 말이 있듯 꾸준히 쓰는 것이 중요하다 ”고 말했다. [사진 정경애(STUDIO 706)]

장르를 넘나들며 탄탄한 극본을 내놓는 유영아 작가. 그는 “‘1만 시간의 법칙’이란 말이 있듯 꾸준히 쓰는 것이 중요하다 ”고 말했다. [사진 정경애(STUDIO 706)]

“잘나가던 국가대표가 시력을 잃는다면 그 마음은 어떤 것일까. ‘형’의 시나리오는 그렇게 시작됐죠.”

창작 지망생에게 ‘좋은 각본’ 특강
“매력적인 입체 캐릭터가 관객 끌어
고전 많이 읽어 필력 키우세요”

23일 서울의 한 극장. 강단에 선 유영아(42) 작가의 말에 온 청중의 시선이 쏠렸다. 그가 각본을 쓴 영화 ‘형’(권수경 감독)의 개봉을 맞아, 한국콘텐츠진흥원 창의인재동반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특강 자리였다. 창작 지망생들을 지원하는 이 사업의 멘토로 활동중인 그는 ‘7번방의 선물’로 1000만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영화 ‘7번방의 선물’

영화 ‘7번방의 선물’

‘국가대표2’ ‘파파로티’ ‘타워’ ‘코리아’ 등 장르를 넘나들면서도 탄탄한 작품을 내놓기로 유명하다. 그의 강연에 더해 따로 진행한 인터뷰에서 뽑아낸 그만의 창작 비결을 추렸다.

유 작가가 거듭 강조한 것은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그는 “한 겹, 두 겹짜리 얕은 인물로는 120분이라는 상영 시간을 결코 채울 수 없다”며 “적어도 지각·맨틀·핵, 이렇게 세 겹은 있어야 강력한 인물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그는 최근 흥행한 영화 ‘밀정’을 예로 들었다. 친일 경찰 이정출(송강호)이 민족을 배신했다는 것, 독립투사와 한때 친구였다는 사실을 넘어 “일본의 앞잡이로 살면서도 친구가 자결하며 부러뜨린 발가락을 간직해뒀던 인물”이란 설정이 더해졌기에 캐릭터가 입체적이었단 얘기다. 그는 “‘형’의 각본을 쓰면서도 인물의 깊이를 오랫동안 고심했다”며 “시력을 잃은 국가대표 두영(도경수)만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기엔 한계가 있어, 그와 갈등을 빚는 형(조정석)을 끌어들여 한 층 더 겹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영화 ‘형’

영화 ‘형’

쓰기 위해선 읽어야 하는 법. 유 작가는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지금 보니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전’에 답이 있더라”며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만 봐도 그 안에 이야기의 재미있는 구조가 다 녹아있고, 인물이 매우 깊이 있게 묘사돼 있다”고 설명했다. 캐릭터를 잘 그리지 못하는 후배들에겐 김려령 작가의 소설 『완득이』를 추천했다.

독서 외에 그가 즐겨하는 일은 라디오 듣기다. 그는 “평소 만나기 힘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어 귀기울여 듣는다”고 말했다. ‘형’의 두영 캐릭터 또한 그렇게 나왔다. “하루는 라디오 DJ와 통화하는 청취자의 목소리가 너무 해맑아 들어보니, 눈이 안 보이는데 장애인올림픽을 준비한다고 하더라. 대체 그 친구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궁금해 쓰기 시작한 시나리오가 ‘형’이다.”

유 작가는 대학 시절부터 시나리오 작가를 꿈꿨지만 데뷔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혼자 딸을 키우며 학습지 교사, 학원 강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매일 저녁 책상 앞에 앉았다. 그렇게 ‘웨딩드레스’가 나왔고, 쉼없이 작품을 발표한 끝에 내로라하는 작가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그가 작가 지망생들의 멘토로 나선 것도 입봉하기까지의 고통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기독교 신자인 내게 영화는 두 번째 신앙이다. 그저 ‘작가가 되겠다’는 강한 믿음으로 그 시간을 견뎠다. 그때 쓴 시나리오가 모두 영화가 된 것은 아니지만, 분명 큰 밑거름이 됐다. 지금도 후배들이 찾아오면 버티고, 또 버티라는 얘기를 해준다”며 “투자사, 제작사 아는 곳 하나 없었지만 내가 잘 쓰면 된다는 생각만 했다. 작가는 학연도 지연도 필요 없다. 오직 필력으로만 살아남는 직업이다”고 말했다. “오직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견딤”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다.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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