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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 정권의 현금인출기가 돼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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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원배 경제부 부데스크

김원배
경제부 부데스크

“기업들은 각종 인허가상 어려움과 세무조사의 위험성 등 기업활동 전반에 걸쳐 직간접적으로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청와대의) 출연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20일 이영렬 특별수사본부장(서울중앙지검장)이 최순실 등을 기소하며 밝힌 내용이다. 발표만 보면 국내 기업은 정권 핵심과 비선 실세에겐 ‘현금인출기’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문득 세종시에서 경제부처를 취재하던 지난해 이맘때가 떠올랐다. 당시 여야와 정부는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처리하기 위해 기업에서 농어촌상생기금을 매년 1000억원씩 10년간 1조원을 걷기로 합의했다. 야당이 주장하는 ‘무역이익공유제(FTA로 이익을 보는 쪽이 손해를 입는 산업을 지원)’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타협안이었지만, 대다수 기업이 이를 알지 못한 채 결정됐다.

이때 전국경제인연합회 등이 포함된 FTA 민간대책위원회는 “상생기금 조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하지만 대책위 내부에선 “정부가 상생기금에 찬성하라는 성명을 내라고 요구했다. 기업들이 반발할 것이란 의견을 전달했지만 소용이 없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정부에선 “강제 할당은 없다”고 해명했지만 이를 그대로 믿는 기업인은 거의 없었다. 당시는 청와대가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을 위해 전경련을 통해 돈을 걷은 직후였고, 기업에서도 모금에 대한 불만이 새어 나올 때였다.

물론 농어촌상생기금은 피해를 보는 농어촌을 지원한다는 명분도 있고, 정부와 정치권이 합의한 사안이다. 하지만 “돈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기업을 동원할 수 있다”는 발상에서 나왔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대한민국 헌법 제59조는 ‘조세의 종목과 세율은 법률로 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조세법률주의 원칙이다. 기업에서 반강제적 모금을 할 바에야 차라리 법인세율을 올리거나 부담금을 신설하는 게 맞다. 최순실 비리 사건과 관계없이 두 야당은 이번 정기국회에서 MB정부 때 낮춘 법인세율을 올리려 하고 있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현행 35%인 법인세 최고세율을 15%로 낮추겠다고 공약했다. 영국도 법인세율을 주요 20개국(G20) 중 최저 수준으로 내리겠다고 한다. 기업을 유치해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다. 이런 경쟁이 벌이지는데도 국내 기업은 돈 내고, 수사를 받아야 하는 처지다. 대통령의 제3자 뇌물수수 혐의를 입증하려는 검찰의 칼날은 기업을 정조준하고 있다.

엄정한 수사로 비리를 털어내야겠지만, 과거의 구습에서도 탈피해야 한다. 더 이상 기업을 대상으로 반강제적 모금을 해선 안 된다. 기업이 인허가상 불이익이나 세무조사를 걱정하지 않고 투자하고 경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기업의 몫이기 때문이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지 않으면, 언젠가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뽑을 수 없을 때가 올 것이다.

김 원 배
경제부 부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