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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35 - 예수의 경고와 최태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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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 광장에는 수돗가가 설치돼 있었다. 유대인들의 정결례를 위한 곳이다. 귀밑 머리를 말아서 길게 늘어뜨린 정통파 유대인들은 여기서 꼭 손을 씻었다. 그런 뒤에 통곡의 벽으로 가서 기도를 했다.

정통파 유대교인이 통곡의 벽 광장에 설치된 수돗가에서 손을 씻고 있다.

정통파 유대교인이 통곡의 벽 광장에 설치된 수돗가에서 손을 씻고 있다.

“밥 먹기 전에 꼭 손 씻어!”
우리에게는 어릴 적 엄마의 잔소리쯤으로 들린다. 유대인에게는 다르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정결하게 씻는 건 유대인들의 율법이다. 랍비 예후다의 기록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다섯 살에 성경을 읽고, 열세 살에는 계명을 준수한다”고 돼 있다. 어릴 적부터 율법은 유대인의 몸과 마음에 깊숙이 박힌다. 그들에게 율법은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다. 유대인은 율법을 지키고, 그 대가로 신은 구원을 약속한다. 그러니 손을 씻지도 않고 음식을 먹는 일은 영혼의 생사(生死)를 가르는 문제다.

예수 당시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에게 다가왔다. 모두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예수에게 이렇게 따졌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어깁니까?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5장2절) 단순히 손을 씻고, 안 씻고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세수(洗手)’를 하지 않는 건 바리새인들에게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 유대 율법에는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정결례가 명시돼 있다. 영화의 한 장면.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 유대 율법에는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정결례가 명시돼 있다. 영화의 한 장면.

예수는 이렇게 받아쳤다. “너희는 또 어째서 너희의 전통 때문에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하느님께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이르셨다.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이 되었습니다’하고 말하면,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의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5장3~6절)

이 구절만 봐도 예수 당시 유대 사회의 교조적 분위기가 읽힌다. 유대인들에게 ‘하느님’은 이미 이데올로기가 돼버린 상태였다. 부모를 공경하라,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는 죽어 마땅하다는 신의 가르침도 그들이 만든 이데올로기 앞에서는 무력했다. 부모에게 드려야 하는 음식도 성전에서 하느님께 바쳤다고 하면 모든 게 용인되는 분위기였다. ‘하느님’만 내세우면 모든 게 통했다. ‘하느님’이 절대적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사회였다. 그러니 예수는 얼마나 갑갑했을까. ‘신의 속성’도 모르는 이들이 하느님의 깃발만 꽂아대고 있으니 말이다.

‘통곡의 벽’ 광장은 사람들로 붐볐다. 총을 든 이스라엘 군인들을 비롯해 유대교 랍비와 유모차를 끄는 여성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으로 와서 기도를 했다. 물론 순례객과 관광객들도 적지 않았다.

‘통곡의 벽’ 광장은 사람들로 붐볐다. 총을 든 이스라엘 군인들을 비롯해 유대교 랍비와 유모차를 끄는 여성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으로 와서 기도를 했다. 물론 순례객과 관광객들도 적지 않았다.

사람들은 대개 손 씻는 행위 자체를 목적이라 여긴다. 그게 아니다. 손을 씻는 행동은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그걸 통해 내 마음을 씻는 것이 목적이다. 율법에는 그렇게 씻어내린 마음으로 기도를 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렇게 청정한 마음에서 올라온 기도야말로 신을 향해 날아가기 때문이다. 내가 틀어쥐고 있지 않으니까.

유대의 율법을 하나씩 따져보면 저마다 이유가 있다. 유대 율법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처음에 손가락들은 대부분 달을 가리켰을 터이다. 그게 손가락이 생겨난 이유였다. 율법이 태어난 까닭이다. 그런데 1000년, 2000년, 3000년 세월이 흐르면서 달라졌다. 달은 어느덧 사라지고 손가락만 남았다. ‘이유’는 사라지고 ‘격식’만 남았다.

유대인들에게 ‘통곡의 벽’은 각별하다. 예루살렘 성전은 수차례 전쟁을 거치며 파괴됐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부분이 ‘통곡의 벽’에 쌓여 있는 석벽 부분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곳으로 와 기도를 한다. 성전의 일부이며 ‘신을 만날 수 있는 진짜 통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통곡의 벽’은 각별하다. 예루살렘 성전은 수차례 전쟁을 거치며 파괴됐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부분이 ‘통곡의 벽’에 쌓여 있는 석벽 부분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곳으로 와 기도를 한다. 성전의 일부이며 ‘신을 만날 수 있는 진짜 통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 당시에도 그랬다. ‘이유’를 잃어버린 유대인들은 ‘격식’만 지키고 있었다. 예수의 눈에는 그게 빤히 보였다. 그러니 율법만 잘 지키는 유대인들에게 “오냐, 오냐, 잘한다”라고 칭찬만 할 수는 없었다. 예수는 끊임없이 그 율법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게 무엇을 위한 율법인지 일깨워 주려 했다.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과격하게 말이다. 그 와중에 충돌은 불가피했다.

나는 광장의 수돗가에 가서 손을 씻었다. 차가웠다. 요르단강에서 예수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때 예수는 손이 아니라 몸 전체를 물에 담갔다. 일종의 ‘씻어내림’이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도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기 전에 꼭 손을 씻는다. 그 역시 ‘씻어내림’이다. 무엇에 대한 씻어내림일까. 우리의 내면에서 요동치는 온갖 감정과 생각과 욕망의 뿌리에 대한 씻어내림이다.

예수가 세례를 받는 모습을 그린 엘 그레코의 1567년 작.

예수가 세례를 받는 모습을 그린 엘 그레코의 1567년 작.

예수에게는 그게 무엇이었을까. 나사렛을 떠나올 때 고향에 남겨둔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걱정과 연민이었을까. 아니면 목수가 되라는 부모의 신신당부를 뿌리친 미안함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100% 신’이자 ‘100% 인간’이기도 했던 그의 내면에서 요동치는 욕망의 편린들이었을까. 어쨌든 예수는 물을 통과했다. ‘씻어내림’을 통과했다. 그렇게 물을 통과하고 일어서는 예수의 머리 위로 성령이 내려왔다. 파드득 파드득 날갯짓하는 비둘기처럼 성령이 내려앉았다. 그 장면을 성경은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마태복음 3장16절)고 묘사하고 있다.

나는 묻고 싶다. 그 순간에 왜 성령이 내려왔을까. 왜 하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앉았을까. 예루살렘의 햇볕은 따갑다. ‘통곡의 벽’ 광장 귀퉁이의 그늘로 갔다. 바닥에 주저앉아 나는 성경을 펼쳤다. 그 대목을 다시 읽으며 묵상했다.

다윗의 시대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신을 만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지금도 남아 있다. 유대인들이 통곡의 벽을 찾아와 기도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 벽이 옛날에 지은 성전을 둘러싼 성벽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다윗의 시대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신을 만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지금도 남아 있다. 유대인들이 통곡의 벽을 찾아와 기도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 벽이 옛날에 지은 성전을 둘러싼 성벽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복음 3장16~17절)

그랬다. 하늘이 열리기 전,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오기 전, 하늘의 소리가 들리기 전에 계단이 하나 있었다. 그게 없다면 하늘이 열렸을까. ‘비둘기’가 내려왔을까. 하늘의 소리가 들렸을까. 그 계단이 있기에 하늘이 열리지 않았을까. 그게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랑하는 아들’이 될 수 있고,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계단’이 과연 뭘까.

렘브란트가 스케치로 그린 ‘예수의 세례’. 물에 젖지 않도록 옷자락을 손으로 쥐고 있는 세례 요한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렘브란트가 스케치로 그린 ‘예수의 세례’. 물에 젖지 않도록 옷자락을 손으로 쥐고 있는 세례 요한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나는 ‘물에서(From the water)’란 대목에 주목한다. 하늘이 열리기 전에 예수는 어디서 올라왔을까. 그렇다. 물에서 올라왔다. 예수는 물을 통과했다. 어떤 물일까. 나를 씻어내리는 물이다. 다시 말해 예수는 ‘씻어내림’을 통과했다. 요르단강에서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는 공생애의 아주 초기였다. ‘십자가’ 이야기는 아직 나오지도 않았을 때다. 그럼에도 나는 물에서 올라오는 예수를 통해 ‘십자가’를 읽는다. 왜 그럴까. 예수가 통과한 물의 힘과 우리가 통과해야 할 십자가의 힘이 서로 통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통과할 때 ‘나’가 씻겨지고 부서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물에서(From the water)’라는 구절이야말로 계단이 아닐까. 우리가 비둘기처럼 내려오는 성령과 통할 수 있는 통로가 아닐까. 우리도 그렇게 ‘씻어내림’을 통과해야 하지 않을까.

예수에게 밥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느냐, 씻지 않느냐는 핵심이 아니었다.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어도 그다지 문제될 게 없었다. 예수는 ‘이래야 해!’라는 율법이 아니라 ‘왜 이래야 해?’라는 율법의 뿌리를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예수에게는 손을 씻느냐, 씻지 않느냐가 아니라 마음을 씻느냐, 씻지 않느냐가 더 핵심이었다. 그걸 모르는 바리새인들이 와서 “음식을 먹기 전에 왜 정결례를 지키지 않느냐”고 따졌던 것이다.

렘브란트의 1648년 작. 예수와 제자들이 식탁에 앉아 있다.

렘브란트의 1648년 작. 예수와 제자들이 식탁에 앉아 있다.

예수는 그들에게 이사야의 예언을 한 토막 읊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이사야의 예언은 예수의 심정과 통한다. 예수는 이사야의 말을 빌려 자신의 마음을 읊었다. 비단 바리새인들만 그럴까. 요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사람들은 하느님을 찬양하고, 예수를 찬양한다. 그러나 마음은 떠나 있다. 예수의 정체인 ‘신의 속성’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다. 굳이 다가설 생각도 없다. 대신 ‘종교적 교리’만 따진다. 교리를 통해 입술로 공경한다.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는 말한다. “너희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결국 헛바퀴다. 우리는 자전거 안장에 앉아 교리만 달달 외우며 헛바퀴를 굴리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의 바퀴가 땅에 닿아 ‘신의 속성’을 향해서 떼굴떼굴 굴러가려면 ‘입술’이 아니라 ‘마음’이 움직여야 한다. 그러려면 ‘물’을 통과해야 한다.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 그걸 통해 ‘나의 집착’이 부서져야 한다. 그럴 때 바퀴가 구르고 마음이 움직인다. 나의 마음에서 신의 마음으로 돌아선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공경이다. 그게 없이 예수를 섬기는 이들을 향해 예수가 말한다. 이사야의 말을 빌려 말한다. “너희는 나를 헛되이 섬긴다.”

이탈리아 화가 야코포 바사노의 ‘최후의 만찬’.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다.

이탈리아 화가 야코포 바사노의 ‘최후의 만찬’.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다.

이 말끝에 예수는 군중을 가까이 불렀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듣고 깨달아라.” (마태복음 15장10절)

예수는 그저 “내 말을 들으라”고 하지 않았다. “듣고 깨달아라”고 했다. 왜 그럴까. 예수의 메시지는 ‘씨앗’이다. 예수의 말을 듣는 건 씨앗을 심는 일이다. 그런데 예수의 씨앗은 심기만 한다고 싹이 트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씨앗을 심어도 시간이 흐르면 그냥 썩고 만다. 씨앗에서 싹이 트려면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아하! 그렇구나”하는 예수의 메시지에 대한 나의 깨달음이다. 그게 있어야 예수의 씨앗이 내 안에서 싹이 튼다. 싹이 트야 뿌리도 내린다. 그래서 예수는 듣는데서 그치지 말고 “듣고서 깨달아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제임스 티소 작 ‘바리새인들을 꾸짖는 예수’. 율법의 눈으로 보면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는 위험 인물이었다.

제임스 티소 작 ‘바리새인들을 꾸짖는 예수’. 율법의 눈으로 보면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는 위험 인물이었다.

“손을 씻지도 않고 음식을 먹는다”고 따지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는 반박했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나 배 속으로 갔다가 뒷간으로 나간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느냐? 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태복음 15장16~18절)

예수의 반박은 명쾌하다. 그의 반박은 이치를 관통한다. 음식은 입으로 들어간다. 입으로 들어간 것은 모두 밖으로 나오게 마련이다. 구멍으로 들어온 것은 구멍으로 나간다. 그게 코든, 입이든, 귀든, 항문이든, 땀구멍이든 말이다. 그러니 문제가 없다. 입으로 들어가는 게 문제가 아니다. 입에서 나오는 게 문제다. 그게 사람을 더럽힌다.

예수의 통찰은 놀랍다. 그는 입에서 나오는 것들의 뿌리를 지적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말이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입에서 나오는 건 마음에서 나온다.” (마태복음 15장18절)

존 파이퍼 작 ‘예수와 바리새인’. 예수의 메시지를 깨닫지 못한 바리새인들이 경멸과 조롱의 시선으로 예수를 쳐다보고 있다.

존 파이퍼 작 ‘예수와 바리새인’. 예수의 메시지를 깨닫지 못한 바리새인들이 경멸과 조롱의 시선으로 예수를 쳐다보고 있다.

결국 ‘마음’이 문제다. 예수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러나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마태복음 15장19~20절) 나는 생각했다. 이 말을 들은 바리새인들의 표정이 어땠을까. ‘율법의 달인’이라는 그들도 예수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지 않았을까. 이치를 꿰뚫는 예수의 반박에 말문이 ‘탁’ 막히고 막히지 않았을까.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말을 깨닫지 못했다. 이해하지도 못했다. 성경에는 그들이 예수의 말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돼 있다. 예수는 그들을 향해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라고 질타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고 만다”며 위험까지 예고했다. 2000년 전에 예수가 던진 이 메시지는 ‘2016년 겨울의 문턱에 선 대한민국’을 겨냥한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출발점도 따지고 보면 1970년대 중반 ‘구국선교단’을 조직해 국정을 농단했던 최순실의 부친 최태민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임스 티소 작 ‘눈먼 이들을 인도하는 눈먼 인도자’.

제임스 티소 작 ‘눈먼 이들을 인도하는 눈먼 인도자’.

박근혜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에서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는 건 결코 사실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래도 의혹은 여전히 남는다. 사이비 종교에 빠져 있는 사람은 결코 “나는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가 나온 사람이라야 “나는 사이비 종교에 빠졌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 “사이비 종교에 빠지지 않았다”는 박 대통령의 말만으로 판단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나는 오히려 박 대통령이 최태민을 어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그게 오히려 판단의 잣대가 되리라 본다.

지난 30년간 각종 공식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은 14차례에 걸쳐 최태민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리고 한결같이 “사심이 없는 사람” “고마운 분” “저를 옆에서 도와주신 분”이라고 했다. 이와 함께 “사이비 종교의 지도자가 아니라 정식 기독교 목사였다”고 답한 적도 있다. 박 대통령은 단 한 번도 최태민에 대해 “사이비 종교인”이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신흥종교ㆍ이단문제 전문가였던 탁명환(1937~94) 국제종교문제연구소장이 생전에 남긴 기록에 따르면 목사가 되기 전 최태민은 무속인에 더 가까웠다. 그는 1973년 대전시 대사동 196번지에 있던 감나무집에 머물며 자신을 “영세계(靈世界)에서 온 칙사”라고 밝혔다. 보문산 골짜기에 있는 그 동네는 대전 지역 초등학생들의 단골 소풍 장소였다. 근처에 전망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전이 고향인 중앙일보의 한 편집기자는 “당시 그 동네에 무당들이 많이 살았다. 무당집의 울긋불긋한 깃발도 곳곳에 꽂혀 있었다. 최태민이 살던 73년 봄에도 나는 그곳으로 봄소풍을 갔다. 최태민이 살았다는 감나무집 주소를 구글 지도에서 찍어봤다. 정확하게 그 동네가 나오더라”고 말했다.

당시 최태민은 영세교(靈世敎)라는 종교를 만들었다. 신도는 별로 없었다. 신흥종교를 꾸리려면 교단과 교리, 그리고 교주의 삼박자를 갖추어야 한다. 최태민에게는 조직이 없었다. 그래서 기독교의 이단문제 전문가들도 ‘기독교 이단사’에서 최태민의 영세교를 하나의 줄기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사이비 종교’라기보다 최태민을 그저 ‘사이비 종교인’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통령이 사이비 종교에 빠졌느냐, 빠지지 않았느냐”는 물음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다. 최태민이 교단을 꾸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박 대통령이 “‘사이비 종교인’에 빠졌느냐, 빠지지 않았느냐”는 물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플랑드르 화가 피터르 브뤼헐 작 ‘눈먼 이들의 행렬’.

플랑드르 화가 피터르 브뤼헐 작 ‘눈먼 이들의 행렬’.

예수는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고 만다”(마태복음 15장14절)고 경고했다. 최태민은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 ‘사이비 목사’였다. 돈을 내고 목사 안수를 받은 ‘사이비 종교인’이었다. 그의 정체성은 오히려 ‘무속인’에 더 가까웠다. 그러니 목사의 직함을 가진 최태민이 ‘구국선교단’을 이끌며 국정을 농단한 데는 기독교의 이름을 표방한 주술주의가 작용한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나는 여전히 박 대통령의 대답이 궁금하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고 난 후에는 최태민을 어찌 생각하는지 말이다. 여전히 ‘고마운 분’ ‘사심이 없는 분’ ‘정식 기독교 목사’라고 보는지, 아니면 ‘사이비 종교인’이라고 보는지 말이다.

만약 최태민을 ‘사이비 종교인’이라고 본다면 박 대통령은 “나는 사이비 종교인에 빠졌었다”고 고백할 수 있을까. 만약 최태민을 ‘사이비 종교인’이 아니라고 본다면 의혹은 더 크게 남는다. 대통령이 ‘사이비 종교’가 아니라 ‘사이비 종교인’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종교계 최고지도자들을 청와대로 불러서 대화를 나눈다고 이런 의혹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물타기를 위한 쇼가 아니냐?”는 의구심만 증폭될 뿐이다. 나는 지금이라도 묻고 싶다. 그리고 듣고 싶다. 박 대통령이 ‘영(靈)의 세계에서 온 칙사’라고 자칭했던 최태민을 지금은 어찌 보는지 말이다. 2000년 세월을 뛰어넘어 예수의 경고는 ‘최순실 국정농단 정국’의 심장을 찌른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고 만다”(마태복음 15장14절)

<36회에서 계속됩니다>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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