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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갈취보다 더 나쁜 예산 갈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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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편집인
고현곤 신문제작담당

고현곤
신문제작담당

정권의 ‘비선 실세’가 부정 축재하는 수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기업 돈을 뺏는 것이다. 보수·진보 정권 가리지 않고 이어져 온 단골 메뉴다. 비선 실세는 기업의 약점을 쥐고 압박했다. 때로는 기업과 이해관계가 맞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래를 했다. 기업 오너만 결심하면 되기에 과정이 복잡하지 않다. 은밀해서 외부에 알려질 위험도 작다. 기업으로선 피해자와 공범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한 셈이다.

다른 하나는 예산을 빼먹는 것이다. 예산은 연간 400조원(2017년 기준)을 넘는 황금어장이다. 하지만 기업 돈을 뺏는 것보다 고난도 기술이 필요하다. 보는 눈이 많기 때문이다. 예산을 요청한 부처에서 속사정을 알 수밖에 없다. 진짜 필요한 사업인지, 누구의 이권이 걸린 건지 등등. 기획재정부 예산실 공무원도 모를 리 없다. 부처 실무자와 1년 내내 사업 타당성을 협의하기 때문이다. 허술하지만, 국회도 예산을 들여다본다. 예산안을 확정하기 전에 심의한다. 쓰고 난 뒤 결산도 한다. 논란이 있는 사업은 시민단체가 검증하기도 한다. 이중 삼중의 감시망이 있어 예산을 빼먹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래서 역대 대통령의 비선 실세는 주로 기업 돈을 챙겼다. 최순실 일당이 놀라운 건 기업 돈은 물론 예산까지 노렸다는 점이다. 시정잡배 수준 같지만, 만만치 않다. 예산을 넘볼 정도로 수법이 대담하고 지능적이다. 예산은 한번 끼워 넣기만 하면 큰 문제가 없는 한 ‘계속사업’으로 굴러가는 맹점이 있다. 잘만 엮어놓으면 정권이 바뀐 뒤에도 적당히 빼먹을 수 있다는 얘기다.

최순실 일당이 예산을 얼마나 빼먹었고, 빼먹을 계획이었는지 정확지 않다. 더불어민주당은 2017년 예산에서 최순실 예산을 20여 개 사업, 5200억원으로 추산했다. 국민의당은 4200억원으로 봤다. 주로 문화·창조·융합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사업이다. 최순실 일당이 문화체육 예산과 창조경제 예산을 타깃으로 삼았다는 전제 아래 추산했다. 유감스럽게도 최순실 예산은 더 구석구석 퍼져 있는 듯하다. 예를 들어 쌀 가공식품을 저개발 국가에 지원하는 케이밀(K-meal) 사업 20억원이 최순실 예산으로 지목받고 있다. 문화체육·창조경제와 관련 없는 농림수산 예산이다.

2017년 예산은 뒤죽박죽이다. 신뢰를 잃었다. 의심스러운 사업은 죄다 타당성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최순실 예산을 고기에서 비계 도려내듯이 잘 발라내야 한다. 문제는 시간이다. 내년 예산을 다시 들여다보기에는 너무 촉박하다. 시국과는 별개로 당장 정부와 국회가 예산부터 검토했으면 한다. 이 과정을 안 거치고 대충 넘어가면 두고두고 논란이 될 소지가 있다.

더 난감한 문제는 이미 집행한 예산이다. 2013년 예산은 이명박 정부에서 만들었다. 이론적으로 최순실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예산은 2014년부터다. 일례로 차은택이 기획한 문화창조융합벨트 예산은 2014년에 처음 71억원 등장했다. 지난해 119억원, 올해 903억원으로 급격하게 늘었다. 이미 1093억원이 어디론가 나갔다. 이 돈을 포함해 지난 3년간 최순실 예산으로 나간 돈이 얼마이고, 어떻게 쓰였는지 따져봐야 한다. 검찰 수사도 이 점을 놓치면 안된다. 최순실 일당에게 흘러들어 갔으면 특별법을 제정하든지 구상권을 청구하든지 무슨 수를 쓰든 되찾아야 한다.

예산 빼먹기는 전 국민을 상대로 한 범죄다. 특정 기업을 등치는 것보다 죄질이 더 나쁘다. 예산을 짠 정부와 자동문처럼 통과시킨 국회는 작금의 상황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최순실 예산을 알고도 묵인했으면 직무유기이고, 몰랐다면 무능한 것이다. 정부는 자신들이 만든 예산안에 칼을 대는 게 무참해서인지 여전히 변명하기 바쁘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거나 정신을 못 차렸다. 뼈아픈 마음으로 반성하고, 반면교사로 삼지 않으면 이런 일은 또 생길 수 있다.

짚고 넘어갈 게 하나 더 있다. 최순실 예산을 줄이는 틈을 타 국회에서 다른 예산을 끼워 넣는 얌체 짓은 곤란하다. 창업, 한류, 평창 올림픽 같은 중요한 이슈가 최순실 쓰나미에 휩쓸려 옥석 구분 없이 훼손되는 일도 없어야겠다.

고 현 곤
신문제작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