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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국정 농단 주범’인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짓밟겠다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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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국정 농단의 ‘주범’으로 피의자 신세가 된 현실에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낀다. 검찰은 20일 “박 대통령이 774억원 대기업 강제모금, 공무상 기밀누설 등의 범죄를 직접 계획하고 최순실 등 측근들에게 실행을 지시했다”고 못 박았다.

 최순실 일당의 전횡을 방조한 수준을 넘어 박 대통령 본인이 전대미문의 국기문란 범죄를 직접 주도한 정황이 수사를 통해 드러난 것이다. 사리사욕을 위해 대통령이 민간인과 한 몸이 돼 국가권력을 사적으로 농단한 셈이다. 검찰은 “(박 대통령의 혐의가) 99% 입증 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 박 대통령은 국가적 범죄의 ‘주범’으로 못 박힌 사실 하나만으로 국민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입혔다. 민주화·산업화를 모두 달성한 대한민국의 자부심도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박 대통령 측이 내놓은 반응은 나라를 생각하는 지도자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뻔뻔한 자가당착의 궤변이었다. 청와대 정연국 대변인은 “수사팀 발표는 전혀 사실이 아닌 사상누각”이라며 “대통령의 책임 유무를 명확히 가릴 수 있는 합법적 절차에 따라 하루빨리 이 논란이 매듭돼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검찰의 공식 수사 결과까지 무시하며 나라를 더욱 깊은 갈등과 분열의 수렁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인가. “합법적 절차로 매듭짓자”는 언급은 “차라리 나를 탄핵해 끝장을 보자”는 뜻으로 풀이된다. 길게는 6개월까지 이어질 탄핵 절차를 통해 시간을 벌면 지지층이 결집해 자신을 지켜줄 것으로 계산한 모양이다. 분노한 민심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허황된 환상에 불과하다. 헛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그토록 강조해 온 ‘법치’도, 그렇게 중용해 온 검찰의 수사 결과도 깡그리 무시하는 오기라고밖에는 볼 수 없다.

 박 대통령의 ‘탄핵 자청’은 국정을 방패 삼고 국민을 인질 삼아 대통령직을 지키겠다는 ‘배째라’식 도박이다. 내년 초 박한철 헌법재판소장 등 헌법재판관 2명의 임기가 만료돼 탄핵이 결정될 가능성이 줄어들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뒀을 것이다. 국민들이 이런 꼼수를 모를 줄 아는가. 나라를 걱정하는 많은 국민은 대통령의 도를 넘은 비리와 일탈에도 불구하고 탄핵이란 극단적 사태 대신 ‘질서 있는 퇴진’을 통한 연착륙을 원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이런 민심을 외면한다면 최소한의 명예를 지키며 퇴진할 마지막 기회마저 날아갈 것이다.

 박 대통령은 대변인을 통해 “앞으로 국정에 소홀함이 생겨나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했다. 탄핵을 당하기 전까지는 대통령의 업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하겠다는 뜻으로 들린다. 이 역시 정상인의 판단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언사다. 박 대통령이 일반 공직자였다면 지금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당장 구속돼 중형을 받아야 할 상황이다. 도대체 무슨 낯으로 공직자들을 지휘하고, 외국 정상들을 만나 국가를 대표하겠다는 것인가.

 도덕적·정치적 정당성을 상실한 데 이어 법적으로도 대통령 자격에 흠결이 발생한 박 대통령에게 남은 길은 하나다. 국정 최고 책임자가 ‘피의자’로 지목된 점 자체를 부끄러워하고 석고대죄해야 한다. 이어 대국민 사과에서 약속한 대로 검찰 수사에 전적으로 협조하고, 대통령으로서의 모든 권한을 책임총리에게 넘겨 ‘질서 있는 퇴진’에 들어가야 한다. 수사 결과가 억울하다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검찰 수사에 응해 반박하는 것이 정답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