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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최순실의 치마도 묶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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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였던 1945년 4월, 이탈리아의 패색이 짙어지자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근 30세나 어린 정부 클라라 페타치를 데리고 국경으로 도망쳤다. 이들은 스위스로 탈출하려 했으나 국경 근처에서 파르티잔에게 붙잡혀 총살당한다. 이탈리아인의 분은 이걸로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성난 군중은 시체를 밀라노로 가져와 주유소에 거꾸로 매달아 놓은 뒤 침을 뱉으며 매질을 했다. 치마를 입은 페타치는 옷이 뒤집히면서 치부가 드러났다. 이를 본 한 중년 여성이 쏟아지는 야유 속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페타치의 치마를 묶어 준다. 이후 이탈리아에서는 “치마를 묶어 준다”라는 말이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켜준다’는 뜻으로 쓰인다.

최순실 사건이 터지면서 온 국민의 분노는 폭발했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격노한 나머지 해서는 안 될 일마저 저지를 때가 있다. 최근 최순실 사건으로 구속된 ‘문화계 황태자’ 차은택씨가 그의 신체적 특징으로 많은 이의 조롱거리가 됐다. 심지어 한 여성 의원은 가발을 벗은 그의 외모를 두고 “차라리 다 밀고 나와야지”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누가 됐든 본인이 알리기 꺼리는 신체적 특징은 아예 언급하지 않는 게 기본 중 기본이다. 비리가 문제지 외모에는 죄가 없다.

최씨의 신발이 ‘프라다’이고 딸 정유라씨의 양팔에 문신이 새겨진 것도 무관하긴 마찬가지다. 딸 정씨가 혼전 임신을 했다 한들 후에 정식 결혼하고 애도 낳았다. 못마땅할 수 있지만 단죄해야 할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여론의 화살이 빗발치고 있다.

최씨의 사건을 맡았다고 선임 변호사의 전력이 까발려지는 것도 사회병리적 현상이다. 어떤 죄인이라도 의뢰를 받았다면 그를 위해 재판정에 서는 게 변호사의 사명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존경했던 변호사 출신의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 그는 서부 개척 시절 빈발했던 철도회사와 주민 간 분쟁을 여러 건 수임했다. 한데 사건에 따라 때로는 철도회사, 다른 때는 주민 쪽을 옹호해 위선자라는 욕을 먹었다. ‘노예 해방의 아버지’로 칭송받지만 링컨은 한 번도 흑인 노예 편에 서지 않았다. 대신 도망쳤던 흑인 노예를 잡아오는 사건을 맡아 주인 입장을 철저히 변호한 적밖에 없다. 이런 게 변호사다.

어떤 악인이라도 변호받을 권리가 있다. 누구나 최소한의 존엄성은 지켜줘야 하는 것이다. 상대가 최순실 일당이라고 이마저 허락되지 않는다면 문명사회라 부를 수 없다.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