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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 칼럼] M&A심사는 독점·효율 사이 ‘균형의 미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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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정재찬 공정거래위원장

정재찬
공정거래위원장

“정치 체제에서 군주가 싫듯이 경제 체제에서 독점이 싫다.” 1890년 미국 최초의 공정거래법인 셔먼법(Sherman Act)을 입안한 미국 전 상원의원 존 셔먼이 한 말이다. 당시 미국 경제는 철강·정유 등 주요 기간산업 내 일부 기업이 트러스트(신탁)의 형식을 빌려 가격 인상, 출고량 조절 등의 반경쟁적 행위를 일삼으며 막대한 이윤을 거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철강왕 카네기’ ‘석유왕 록펠러’ 등이 이런 방법으로 천문학적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이렇게 쌓은 부는 소비자 의 이익을 빼앗아 온 것이라는 문제의식에서 트러스트를 규율하기 위한 공정거래법이 태동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공정거래법을 반트러스트법이라 부른다.

셔먼법이 제정된 이후에도 우려했던 상황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24년이 지난 1914년 클레이튼법이 제정되면서 공정거래법에 새로운 내용이 추가됐다. 인수·합병에 대한 규율이다. 인수·합병을 새롭게 규율하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었다. 공정거래법으로 기업이 경쟁사와 함께 가격 등을 담합하지 못하게 하게 되자 경쟁사를 사버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 결과 석유왕 록펠러는 스탠더드오일을, 철강왕 카네기는 유에스스틸이라는 거대 기업을 세워 계속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경쟁 당국이 인수·합병을 심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독과점을 형성하고 강화하는 인수·합병으로 소비자가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공정거래법을 도입한 대부분 국가가 기업결합 심사 제도를 두고 있고 한국 역시 1981년 공정거래법 제정 당시부터 이 제도를 도입했다. 그런데 인수·합병이 담합보다 더욱 공고하게 독과점을 형성할 수 있다면 모든 인수·합병을 금지해야 할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두 개의 기업이 합치면 독과점이 강화될 수도 있지만 생산 비용의 감소 또는 기술 혁신 등으로 이어져 효율을 높이고 소비자에게 편익을 줄 수도 있다. 담합을 시장경제의 가장 큰 적이라고 부르지만 인수·합병을 그렇게 부르지 않는 이유이다.

이런 점에서 인수·합병 심사를 독점과 효율에 대한 균형의 미학이라 부를 수 있다. 독과점을 강화하는 인수·합병에 대해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는다면 소비자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 하지만 효율성 강화 효과가 더 큰 인수·합병을 막는다면 그 역시 소비자에게는 손해다. 그런데 경쟁 제한적 폐해나 효율성 모두 미래에 대한 예측이라는 점에서 그 평가가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다양한 분석 기법을 동원해 관련된 모든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고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미래를 정확히 예측해야 한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매년 600건 내외의 인수·합병을 신고받아 심사하고 있다. 물론 대부분은 경쟁 제한 우려가 낮고 효율성을 높이는 효과도 커 제한 없이 허용되고 있다. 일부 소비자 이익을 침해할 수 있는 인수·합병에 대해서만 개입하고 있다. 독과점을 강화하는 경쟁 제한적 인수·합병과 효율성이 큰 인수·합병을 가려내는 일이야말로 경쟁당국 본연의 임무이고 소비자가 중심인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는 일이 공정거래법 본연의 취지다. 100여 년 전 거대 기업의 횡포에서 시름하던 미국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 재 찬
공정거래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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