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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오디세이 2016 참가자 릴레이 기고 <14> 극동 러시아의 지정학을 다시 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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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희옥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 성균중국연구소장

이희옥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
성균중국연구소장

중국을 공부하는 필자는 늘 헤이룽장으로 열린 창을 통해 극동 러시아를 보아왔다. 그곳은 초겨울부터 봄이 올 때까지 오랫동안 얼어 있었고 산업의 꽃이 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의 ‘일대일로’ 바람이 불고 러시아가 동진을 선택하면서 시야에 잡혔다. 2016 평화 오디세이 일행이 지난 8월 아무르강을 돌아볼 때만 해도 그 변화를 실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의 골목은 달랐다. 중국 상품과 중국인들로 넘쳐났고, 자루비노 항구는 중국 물건을 싣고 바다로 나갈 준비를 마쳤다.

러시아 서방 맞서 중국 껴안아
영토 반환 노리는 일본도 친밀
한국도 전략적 가치 활용 필요
때 놓치면 패자부활 기회 없어

중국이 이곳 극동으로 눈독을 들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중국의 동북지역은 수년째 경기침체의 늪에 빠져 있고 국내 구조조정만으로는 노후한 중공업기지의 한계 돌파가 어려운 실정이다. ‘길이 나야 돈이 흐른다’는 것을 체득한 중국은 길을 따라 도로·철도·에너지 수송로를 내면서 극동으로 다가갔다. 지난해 시진핑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4000억 달러에 달하는 동시베리아 가스 파이프라인을 공급하는 ‘세기의 협상’을 맺은 것이 그 결실이다. 그동안 중국과 러시아는 북대서양조약기구의 동진정책과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전략에 대해 각각 러시아의 동진과 중국의 서진정책으로 서로 다른 방향으로 길을 터주면서 전략적 협력을 강화해 왔다.

이들이 다시 극동에서 재회했다. 푸틴은 재집권 후 극동개발부를 설치했고 ‘경제자유’는 극동 개발의 우선순위라고 선언했으며 블라디보스토크항과 자루비노항 등 자유항은 8일간의 무비자 입국, 24시간 통관 업무, 거주자에 대한 세제 혜택을 주는 곳으로 탈바꿈했다. 이러한 극동의 지휘자는 바로 푸틴이었고 중국은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다. 올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2차 동방경제포럼에 중국은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운송·식품·농업·광업·조선·관광 분야에 사업신청서를 내고 자유항 입주를 신청했다.

러시아 극동 자유항인 자루비노. 한국이 머뭇거리는 사이 중국 자본과의 공동 개발이 추진되고 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러시아 극동 자유항인 자루비노. 한국이 머뭇거리는 사이 중국 자본과의 공동 개발이 추진되고 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러나 러시아에는 깊은 고민이 있다. 무엇보다 야심 찬 러시아의 ‘아시아 시프트’가 대중국 의존을 심화시키는 일종의 ‘차이나 시프트’로 전락하고 있다는 위기감이다. 우선 1991년부터 2015년까지 극동연방 관구의 8개 공화국 인구가 22% 감소했고 그 공간을 중국이 물 밀 듯이 들어왔다. 그러나 의미 있는 중국 기업은 루블화 급락과 정체 일로인 러시아와의 깊은 경제협력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2015년 무역 규모만 해도 전년 대비 29%가 감소했고 350개의 투자계획 중 실행된 것은 4%에도 미치지 못하는 등 외화내빈 상태였다. 심지어 중국은 우크라이나와도 인프라 건설과 금융 협력은 물론이고 군함 조달을 비롯한 군사협력을 추진했다. 지난해 9월에는 중국 군함이 처음으로 베링해를 항행하는 등 북극해로 진출하려는 시도 역시 러시아판 ‘중국 위협론’을 불러일으켰다.

이로부터 러시아는 위험을 분산하는 균형을 찾고자 했다. 우선 러시아는 에너지 협력과 무기 수출을 매개로 중국의 라이벌인 인도와의 관계를 강화하기 시작했고 동방정책의 종착점이라 할 수 있는 아세안과의 지역 협력에도 적극적이다. 무엇보다 일본과의 관계 개선 시도는 러시아 균형외교의 백미였다. 양국 사이에는 북방영토라는 현안이 있고 러·일 접근에 대한 불편한 입장을 지닌 미국도 의식해야 하는 등 쉽지만은 않은 과정이지만, 아베 신조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서 주어진 ‘전후체제’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대담하게 ‘새로운 접근’을 시작했다. 이미 아베는 집권 이후 5차례나 러시아를 방문했고, 강력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 푸틴 체제에서 현안을 처리하는 ‘그랜드 바겐’을 시도하고 있다. 일본은 북방 4개 섬에 대한 잠재주권을 확보할 수만 있다면 러시아 경제의 구원투수로 등장할 가능성은 항상 남아 있다.

그런데 러시아는 극동지역의 동태적 전환 과정에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주목했고 다양한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왜냐하면 네르친스크조약·캬흐타조약·아이훈조약·베이징조약을 거치면서 바다로 나가는 출구를 잃은 중국이나 북방영토에 대한 역사적 집착이 강한 일본에 비해 한국은 역사와 영토의 장애가 없고 러시아가 필요로 하는 자본과 기술 등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지구온난화의 예기치 않은 결과로 북극의 결빙 기간이 짧아지면서 새로운 항로가 열리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상황은 점차 패자부활이 쉽지 않은 환경을 맞이하고 있다. 한반도 통일의 지도를 들고 북방 개척에서 그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지정학은 스스로 지도를 그리는 힘(mapping power)이다. 이러한 상상력을 현실로 바꾸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만이 연해주의 너른 들판에서 독립과 해방을 위해 생명을 초개와 같이 버렸던 선각자들을 당당하게 호명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희옥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성균중국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