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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영기의 시시각각

탄핵과 하야를 바라는 세력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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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전영기 논설위원

전영기 논설위원

현실의 속도가 생각의 속도를 압도하고 있다. JTBC 보도 보름 만에 추락한 박근혜 권력이 그렇고 세계 증시가 곤두박질한 트럼프 시대의 도래가 그렇다. 이 이상 현기증 나는 사건이 있을까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현실이 쓰나미처럼 덮친다. 그래도 변치 않게 감동을 주는 장면들이 있다. 당선 직후 트럼프가 선거 캠프에서 기쁨의 연설을 할 때 지지자들이 외쳤던 단어는 “유에스에이” “유에스에이”였다. 그들은 “트럼프”가 아니라 “미국”을 연호했다. 트럼프가 “나는 모든 미국인의 대통령”이라고 선언할 때 묵직한 감동이 왔다. 그렇게 죽기살기로 싸우다가 때가 되면 애국심으로 하나가 되는 나라, 정파를 뒤로 하고 국민을 앞세우는 지도자의 언어가 근사했다.

박근혜의 노림수, 문재인의 로드맵
광화문 시위 명예혁명으로 만들기

지난 주말 광화문광장의 시위도 내게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청와대로 몰려가자”는 선동은 먹히지 않았다. 조국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자조나 비난은 없었다. “퇴진하라”고 했지만 증오와 분노, 핏발 선 투쟁심은 아니었다. 어리석은 권력자를 풍자하는 시민의 여유가 흘렀다. 그들은 권력을 빼앗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손에 이미 권력이 들어와 있었다. 한국의 시민 민주주의는 1960년, 80년, 87년 세 차례 피의 투쟁을 거치면서 단련될 대로 단련됐다. 권력의 속성을 꿰뚫고 있으며 그 음모나 반동의 냄새를 읽고 있다. 포퓰리즘의 위험과 이상주의가 내포한 분열성, 교묘하게 포장된 대권욕의 함정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다. 2016년 가을, 대한민국의 광장 민주주의는 가장 진화된 주권자의 명예혁명이 될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이번 주말 광화문 상황을 관찰하면서 2선 후퇴를 결단해야 한다. 그는 권력에 미련이 많다. 국회에 새 총리를 합의해 달라는 말은 제대로 했는데 자신의 운명을 국민에게 맡기겠다는 얘기는 안 했다. 그는 어쩌면 야당이 힘으로 몰아붙여 자신을 탄핵해주길 바라고 있다. 새누리당을 잘 활용해 탄핵안을 부결시키기만 하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계산법이다. 시민혁명은 그 반동과 복고의 가능성을 눈치채고 있다. 그러므로 박 대통령은 헛된 기대를 접고 국회와 국민한테 2선 후퇴를 선언해야 한다.

다만 문재인이 말한 엉터리 2선 후퇴는 곤란하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내각의 권한을 넘어서는 대통령의 고유권한 즉, 국정원과 군통수권, 계엄권 등을 거국중립내각에 넘기라”고 주장했다. 군 통수권(헌법 74조), 계엄권(77조) 같이 헌법에 일일이 명시된 권한을 넘기라니…. 박 대통령에게 헌법 위반을 선언하라는 소리다. 대통령이 통치능력을 상실했다고 해서 위헌을 요구해도 되는가. 법률가에 청와대 비서실장, 국회의원을 지낸 문 전 대표가 이런 반헌법적 발언을 왜 했을까. 눈앞에 어른거리는 대권욕 때문일 것이다. 판단이 흐릿할 땐 옆에서 참모들이 바로잡아 줘야 하는데 그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은 모양이다.

문재인의 본심은 자기 입으로 “퇴진”을 말하지 않으면서 한 발짝씩 압박해 대통령을 하야시키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반헌법적 무리수를 두는 걸 이해하기 어렵다. 하야가 이뤄지면 헌법에 따라 60일 이내 대선이 있게 된다. 지금 조기 대선에서 당선될 사람은 문재인밖에 없다. 결국 탄핵은 박근혜 세력이, 하야는 문재인 세력이 노리는 바다.

광화문 시위는 특정 정파나 세력을 위해 봉사하면 안 된다. 내가 보기에 박 대통령의 2선 후퇴는 ①새누리당 탈당 ②의회 총리의 등장 ③청와대 비서실 축소를 동시에 수행함으로써 완성된다. 왜 그런가. 새누리당에서 탄핵 반전의 노림수가 웅크리고 있고, 의회 총리가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정치적으로(헌법적으로가 아니다) 물려받을 수 있으며, 청와대 비서실이 제왕적 대통령의 근거지이기 때문이다. 당·정·청을 바꿔 버리면 집권세력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하게 된다. ①②③식으로 거국중립내각을 구성하면 박 대통령의 노림수도 통하지 않는다. 광화문의 시민결집은 한국 역사에 명예혁명으로 남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 야당도 대통령도 2선 후퇴에 관한 발상을 전환하길 바란다.

전영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