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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는 잘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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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이기호의 장편소설 『사과는 잘해요』를 다시 펼쳐 들었다. 2009년 발표된 작품이다. 7년이 지난 지금에도 꽤나 아찔하다. 책장을 덮는 순간 마음이 아렸다. 소설 속 지옥도가 허구라는 점에서 작게나마 위안이 됐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소설보다 더한 눈앞의 세상이 부조리극 자체다. 박근혜 대통령이 두 차례 사과문을 내놓았지만 되레 성난 민심에 부채질을 했다. “잘못했다”는 최순실·차은택의 울먹임도 ‘악어의 눈물’로 비친다.

『사과는 잘해요』는 죄와 용서에 대한 가시 돋친 우화다. 그 중간에 사과가 놓여 있다. 내 잘못, 내 범죄를 반성한다는 쉽고도 어려운 문제를 파헤쳐 나간다. 작품의 뼈대는 우스꽝스럽다. 복지시설에 강제로 갇힌 두 ‘모자란’ 사내가 유일하게 잘하는 것은 남이 지은 죄를 대신 사과하는 일. 심지어 없는 죄도 만들어 매를 자초한다. 그들은 복지원에서 나가서도 “돈이 된다”는 꾐에 빠져 ‘사과대행업’이란 기상천외한 일을 맡게 된다.

예컨대 이렇다. 그들은 동네 정육점 주인을 찾아가 과일가게 주인에게 사과를 하라고 강요한다. 배드민턴 칠 때 공을 높이 띄운 것도, 도시락 반찬을 두 번 더 집어먹은 것도, 캔맥주를 빨리 먹은 것도 죄가 될 수 있다고 억지를 부린다. “아저씨들이 쑥스러울 테니 우리들이 대신 사과를 하겠다”고 제안한다. 황당하기만 하다. 또 아내와 자식을 저버린 중년 남성의 의뢰로 무너진 집안 살리기에도 나선다. 반면 결과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소설가 이기호는 위악적이다. 죄를 찾고, 만들고, 키우는 3단계 과정을 찬찬히 보여 준다. 사과가 사과를 만들어 내는 악순환을 주목한다. 그 사이에 진심이란 순수한 마음은 끼어들 틈이 없다. 죄의 고백은 되레 폭력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소설 초반 지능이 떨어지는 이들을 이용해 사리를 챙겼던 복지원장의 말 한마디, 즉 “죄는 모른 척해야 잊혀지는 법이거든”이 무겁게만 다가온다. 마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예시한 것 같다.

사과와 용서의 수용과 판단은 피해자의 몫이다. 이기호는 ‘작가의 말’에서 “이제 나에게 ‘죄’의 반대말은 ‘무죄’가 아닌 ‘사과’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고 했다. 가해자의 거짓 사과를 꿰뚫은 말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서 아들을 죽인 범인이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다”며 태연해하는 모습을 보고 절규하던 엄마 역의 전도연도 잊을 수 없다. 국민을 피해자로 만든 국정 농단을 철저히 수사해야 할 절박한 이유다. 또 다른 의혹을 남기는 한 사과는 계속될 것이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