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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박 대통령, ‘김병준 총리’ 철회하고 2선 후퇴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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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민심은 무서웠다. 지난 5일 저녁 광화문 거리에 20만 명의 시민이 쏟아져 나왔다. 여섯 살배기 유치원생의 고사리 손에도, 팔순 노인의 주름진 손에도 촛불이 들려 있었다. 이심전심의 국민 참여 열기에 중·고등학생들까지 가세했다. 민주공화국의 공적 시스템을 사적 집단이 망가뜨려 놓은 반국가적 범죄에 청와대가 가세한 데 대해 국민은 “하야하라”고 한목소리를 냈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역풍은 민심에 눈감은 박근혜 대통령의 두 번째 대국민 사과가 부른 결과이기도 하다.

중고생까지 나선 20만 촛불 민심 외면할 건가
국회에 내치·외치 권한 갖는 총리 추천권 주고
여당 탈당해야 사태 수습하고 거국내각 가능

이제 박 대통령이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조롱거리가 된 ‘김병준 총리’ 카드를 철회해야 한다. 국회에서 추천하는 총리를 받아들이고, 신임 총리에게 조각권을 비롯한 내치와 외치를 망라한 모든 국정 권한을 넘겨 거국중립내각이 조속히 출범하도록 해야 한다. 이와 함께 새누리당을 탈당해 중립성이 생명인 거국내각이 제대로 작동될 수 있게끔 도와야 한다.

박 대통령 스스로도 두 차례 대국민 사과가 민심을 더욱 격앙시켰을 뿐임을 인식하고 진정성을 추가로 보여줄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최순실 정국’의 분수령이 될 금주 안에 납득할 만한 수습책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될 것이다.

박 대통령의 연이은 헛발질은 민심과 한참 동떨어진 안이한 상황 인식에 근본 원인이 있다. ‘최순실 게이트’가 아닌 ‘박근혜 게이트’가 현 사태의 본질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지금도 “순수한 마음에서 한 일” “내가 국정에서 손을 떼면 나라가 더 어려워진다”는 식의 비현실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식의 변명과 책임회피·유체이탈 화법으로는 어떤 수습책을 내놔도 국민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없다.

청와대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김병준 총리’를 거부하는 야권을 상대로 전방위적인 설득에 나설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지율 5%로 민심에 의해서 거부된 대통령의 뜻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결국 박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에서 빠진 ‘모든 권력의 총리 이양’과 ‘2선 후퇴’ 방침을 본인 입으로 분명히 밝히고 새누리당을 탈당하는 게 우선이다. 그런 뒤 직접 국회를 찾아가 “모든 문제를 논의할 용의가 있다”며 야당이 영수회담에 응해줄 것을 설득해야 한다. 이럴 경우 야당도 적극적으로 화답해야 할 것이다.

새누리당도 해체 수준의 환골탈태를 해야 한다. 대통령 감싸기에 급급한 이정현 대표는 당을 이끌 리더십을 상실한 지 오래다. 그가 자리를 지킬수록 분당의 위험성만 커질 뿐이다. 대한민국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해 있다. 새누리당이 나라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속히 이 대표를 퇴진시키고, 국민의 신망을 받는 외부 인사를 위원장으로 영입해 비상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상황의 위중함을 생각해 사태 수습의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