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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지긋지긋한 상명하복 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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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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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

요즘 한국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질문은 아마 “정말 몰랐냐”일 것이다. 청와대 비서실에도 묻고, 국회 출석한 장관에게도 묻는다. “정말 ‘그 사람’을 몰랐느냐”고. “몰랐다”고 발뺌하면 면피가 된다고들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질문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다. “왜 눈 감고 입 닫고 있었느냐”는 보다 근본적 물음 말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 박근혜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보좌한 청와대 비서실이나 내각을 통틀어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정도다. 그는 국무회의에서 소신 발언을 하고 장관으로서의 권한을 지키려다 면직이라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불명예 퇴진을 했다. 교과서적으로만 볼 때 부당한 명령이나 수긍하기 어려운 결정이라면 ‘그 사람’의 존재와 무관하게 누구라도 유 전 장관처럼 때론 윗사람 뜻을 거스르는 발언을 했어야 한다. 하지만 ‘윗분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안 된다’는 얄팍한 처세술이 판치는 현실에선 아무도 입조차 뻥긋 하지 않았다. 최측근 실세로 통했던 우(右)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에 빗대 좌(左)종범으로 불렸던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도 마찬가지다. 사건이 불거진 지금에서야 적극적인 ‘부역자’로 포승줄에 묶이는 신세가 됐지만 그동안엔 대통령 잘 모시는 처세로 오히려 세간의 부러움만 샀다. 직언을 한 사람은 모가지가 날아가고, 불법임에도 윗사람 뜻을 그대로 받든 사람은 승승장구했으니 다들 처세술 운운하며 눈을 감고 입을 닫았던 모양이다.

나랏돈 받는 공직자라는 사람들이 장님·벙어리 노릇 한 대가로 연거푸 요직에 등용되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며 나라를 망쳐왔다는 게, 나는 ‘그 사람’의 조종을 받았다 의심받는 대통령이나 ‘그 사람’의 존재보다도 더 기괴하고 공포스럽다. 대통령이나 ‘그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이지만 이런 일은 언제라도 다시 반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라가 이렇게 망가질 대로 망가진 건 물론 전적으로 대통령 탓이다. ‘그 사람’의 존재를 철저하게 숨긴 거짓말, 직언할 사람을 옆에 두지 않은 무능함 등은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참에 우리 사회에 여전히 뿌리 깊은 군대식 상명하복(上命下服) 문화도 돌아봤으면 싶다. 나라 망친 공범들이 별다른 죄의식 없이 불법·탈법적 행위를 하며 자리 보존할 수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상명하복이라는 심리적 방패막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니 말이다. 일사불란하고 조용하기만 한 조직은 미래가 없다. 시끄러워지자.

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