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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정유라 대출’ 하나은행, 담당자는 임원 승진…특혜 없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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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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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경
경제부 기자

‘비선 실세’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의혹이 금융권으로 번졌다. 최씨의 딸 정유라씨가 KEB하나은행으로부터 독일에서 특혜성 대출을 받고, 현지에서 대출을 담당한 직원이 임원으로 고속 승진했다는 내용이다.

은행 인사까지 최순실 씨 개입 의심
금감원 “인사권은 행장 고유 권한”
문제 커지자 “담보 등 점검해보겠다”

이는 지난달 28일 열린 국회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정재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처음 제기했다. 발단은 정씨가 지난해 10월 옛 외환은행(하나은행으로 통합) 독일법인으로부터 25만 유로(3억2000만원)의 외화대출을 받은 사실이다. 기업이 주로 쓰는 외화지급보증서를 활용해 독일 현지에서 대출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특혜대출’ 논란이 제기됐다. 당시 독일법인장이었던 이모(54)씨는 올해 1월 요직인 서울 삼성타운지점장을 거쳐 한 달 만에 임원급인 글로벌2본부장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이런 가운데 ‘위인설관(爲人設官·특정인을 위한 자리 마련)’ 의혹까지 터져나왔다. 하나은행이 이 본부장 승진에 앞서 글로벌본부를 1본부와 2본부로 나눴다. 정치권과 금융권에선 이를 두고 “KEB하나은행이 이씨를 본부장에 앉히기 위해 새 자리를 만들었다”는 말까지 나온다. 이에 대해 하나은행은 “정씨처럼 외화지급보증서를 발급받은 고객이 800명이 넘고, 글로벌본부 분리는 지난해 하나·외환 통합 후 글로벌사업 이익 비중을 늘리려는 전략 목표 하에 이뤄진 것”이라고 해명했다.

의혹이 커지고 있지만 은행을 감독하는 금융감독원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특혜 대출 논란에 대해 애초 “대출 과정이 적법하기 때문에 더 조사할 건 없다”고 했다가 뒤늦게 “금리나 담보에 문제가 없는지 점검해 보겠다”며 조사에 나섰다. 임원 승진 의혹에 대해서도 “인사는 은행장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에 금감원의 감독 영역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조사에 나설 뜻이 없다는 입장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하나은행으로부터 내부 기준과 평가에 따른 적절한 임원 인사였다는 설명을 들었다”며 “그 이상은 금감원이 할 게 없다”고 말했다.

이런 금감원의 태도에 대해 “권력의 눈치를 보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회사의 건전경영과 지배구조 유지 차원에서 대출과 인사의 적절성을 감독하는 건 관련법(은행법·금융회사지배구조법)에 규정된 금감원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금융소비자단체인 금융소비자연맹의 강형구 국장은 “금감원이 최씨, 정씨와 관련한 의혹을 해소하지 않는다면 이는 명백한 직무유기”라고 말했다.

해외에서 외화로 대출을 받는 것은 국내에서 조성된 불법 자금을 세탁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수도 있다. 은행 해외법인 책임자가 이런 일에 관여했다면 마땅히 조사 대상이다. 은행은 수백조원의 고객 자금을 관리하는 만큼 어느 기업보다 지배구조의 안정성이 중요하다. 그런 은행의 임원 인사에까지 ‘비선 실세’의 입김이 작용했다면 지배구조와 은행의 신뢰도를 통째로 흔들 수 있는 심각한 사건이 될 수 있다. 더구나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의혹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극에 달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금감원이 법에 정해진 책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국민의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다. 이는 언젠가 이번 사태가 정리됐을 때 금감원에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다. 지금이라도 금감원은 특혜 대출과 임원 승진 개입 의혹을 철저히 밝혀야 한다.

이태경 경제부 기자 uni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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