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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오름기행] 신의 기운 품은 작은 한라산…병풍 둘러친 100m 주상절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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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오름기행 ⑮ 산방산

한라산을 쏙 빼닮은 산방산. 산방산 서남쪽 아래에서 올려다본 모습이다. 산방산은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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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방산은 오름 이상의 오름이다. 제주 사람이 스스럼없이 오르내리는 동네 오름과 산방산은 격이 다르다. 제주도 서남해안에 우뚝 솟아 있는 모습만으로도 산방산은 여느 오름과 비교를 거부한다. 우람한 풍채와 당당한 생김새에서는 범접하기 힘든 기운마저 풍긴다. 실제로 산방산은 범상치 않은 기를 품은 오름이다. 산방산을 무대로 숱한 전설과 신화가 전해 내려오며, 지금도 사찰과 암자 6곳이 산방산의 거대한 품에 안겨 있다. 다른 오름에서는 사람 냄새를 맡지만 산방산에서는 신의 기운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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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영역

가장 익숙한 산방산의 모습. 정면, 그러니까 바다 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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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오름에도 산(山)이 많다. 산방산 · 영주산 · 단산 · 송악산 · 군산 · 고근산 등등 오름이 아니라 산으로 불리는 오름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애초부터 산이었던 오름은 많지 않다. 일제 강점기 이후 한자로 지명을 표기하면서 산으로 불리는 오름이 대부분이다. 이를테면 단산의 원래 이름은 바굼지오름이었고, 송악산의 옛 이름은 절울이오름이었다.

그러나 산방산은 처음부터 산이었다. 그것도 ‘산에 방이 있다’는 뜻의  산방(山房)이라는 한자 이름이 그대로 전해 내려왔다. 오름 중에는 이름을 서너 개 거느린 것도 많지만 산방산은 오로지 산방산 하나뿐이다. 왜 그럴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어도 정황 증거는 있다. 제주 무속신앙에서 일컫는 삼신산(三神山)이 있다. 신이 살고 있다는 제주도의 세 산은 한라산과 산방산, 송악산이다. 제주 창조신화에는 5대 산도 등장한다. 한라산 ·영주산 ·산방산 · 청산(성산일출봉) · 두럭산(김녕 앞바다의 암초로 실제 산은 아니다)이다. 이 두 이야기에서 공통으로 등장하는 두 주인공이 있다. 한라산과 산방산이다. 오름 중에는 산방산이 유일하다.

사계해수욕장에서 바라본 산방산. 이 또한 익숙한 모습이다. 사계해수욕장은 원래 ‘설큼바당’이라 불리던 해안이다. 눈이 내리면 흰 눈 사이로 보이는 검은 모래가 아름다워 붙은 이름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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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부터 산방산은 신의 영역이었다. 제주 사람이 소 풀고 촐 비러(꼴 베러) 다니던 생활의 영역이 아니었다.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아니 함부로 드나들어서는 안 되는 성스러운 공간이었다. 산방산 아랫자락을 따라 사찰과 암자 6개가 터를 잡은 까닭이고, 산방산 자락이 오늘도 금장지(禁葬地 · 묘를 쓰면 화를 입는 땅)로 인식되는 이유다. 산방산에 구름이 끼면 ‘건들마(마른장마)’가 든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산방산 북쪽 마늘밭에서 바라본 모습. 이 모습을 보고 바로 산방산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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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방산은 웅장한 오름이다. 해발고도는 395m이지만 비고는 최대 340m에 이른다. 한라산 자락에 산방산보다 해발고도가 높은 오름이 허다해도 제주 오름 중에서 산방산보다 비고가 높은 오름은 없다(김종철, 『오름 나그네』). 제주도 남쪽 바다를 지척에 둔 안덕면 사계리 · 덕수리 일대 평야지대에 산방산은 홀로 솟아 있다. 그렇게 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산방산은 주변 풍경을 압도한다. 

산방산 북서쪽 메밀밭에서 바라본 모습. 이 방향에서도 산방산은 다르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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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방산은 거대한 종을 엎어놓은 것처럼 생겼다. 화산분류법에 따라 종상화산이라 불린다. 산방산의 정확한 경사도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종 모양치고는 가파르다. 산비탈의 단면만 보자면 직각에 가깝다. 오름치고는 독특한 모양인데, 지질학에서는 ‘점성이 강한 조면암질 마그마가 분출해 지금과 같은 모양이 형성됐다’고 설명한다. 마그마가 점성이 강해 강력하게 분출하지 못하고 꾸역꾸역 흘러 넘치면서 분화구 주변에 차곡차곡 쌓였다는 얘기다. 촛농이 흘러나와 굳은 모양을 연상하면 맞겠다.

산비탈의 거칠고 험한 암벽은 용암을 꾹꾹 눌러 담은 화산이 오랜 세월 바닷바람을 맞아 깎이고 패면서 형성된 흔적이다. 그래서 바다를 마주한 남쪽 비탈이 북쪽 비탈보다 더 가파르다. 산방산은 70만∼120만 년 전에 생성한 것으로 측정된다. 서귀포 앞바다의 범섬 · 섶섬 등과 함께 제주도에서 가장 오랜 지형 중 하나다.

산방산은 웅대한 암봉이며 강고한 암벽이다. 산방산 기슭에는 완만하고 부드러운 곡선이 없다. 시인 이성복은 오름을 ‘한심하고 어설픈 가난의 곡선(『오름 오르다』)’이라고 명명했지만, 산방산은 염두에 두지 않은 발언이다. 오름이라는 낱말의 어원이 ‘오르다’는 동사라는 사실을 환기한다면, 비록 여느 오름과 같은 방식으로 태어났다 해도 산방산은 오름이라 불릴 수 없다. 산이어야 옳다. 인간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 히말라야의 설산처럼 고고하고 신성한 산 말이다. 굳이 오름이라 한다면, 바라보는 오름이다.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멀찍이서 올려다보는 오름이다.

산방산에 얽힌 전설도 여느 오름에 전해오는 전설과 차원이 다르다. 한 사냥꾼이 한라산에서 사냥을 하다가 활을 잘못 쏴서 옥황상제의 옆구리를 건드렸다(옥황상제가 아니라 설문대할망이고 옆구리가 아니라 엉덩이라는 얘기도 있다). 크게 노한 옥황상제가 홧김에 한라산 정상의 암봉을 뽑아서 던졌는데, 그 집어던진 암봉이 날아와 꽂힌 것이 산방산이다. 암봉이 뽑힌 자리는 백록담이 됐단다. 허무맹랑한 전설인데도 허투루 들리지만은 않는다. 산방산과 백록담의 둘레가 얼추 비슷하기 때문이다. 산방산과 백록담이 똑같이 조면암 성분으로 이뤄졌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무엇보다 산방산 정상에는 분화구가 없다.

 그러나 전설은 전설일 뿐이다. 산방산과 한라산은 생성시기가 다르다. 산방산은 최소 70만 년 전에 생성한 반면 한라산 정상부는 겨우 2만5000년 전에 생겼다. 오름 정상에 움푹 팬 분화구가 없는 것은 특이한 사실이지만 점섬이 강한 마그마가 천천히 흘러 나왔다면 일시적인 폭발의 흔적인 분화구가 없는 꼴이 도리어 당연할 수 있다. 한라산 사냥꾼의 전설은 서귀포 앞바다에 떠 있는 세 섬, 섶섬과 문섬 그리고 범섬에도 똑같이 전해온다.

사람의 자리

산방산 정상은 현재 오를 수 없다.  4년 전까지만 해도 산방산 정상은 개방돼 있었다. 그러나 2012년부터 2021년까지 산방산 정상 탐방로는 출입이 통제됐다. 워낙 가팔라 안전사고가 잦은 데다 정상부에 자라는 지네발란 · 섬회양목 등 희귀식물의 훼손이 심해 길을 막았다고 한다. 산방산 정상에 ‘선인탑’이라고 불리는 큰 바위 위에 앉아 신선 모양 세상을 내려다보고 싶었는데 문화재청은 끝내 취재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선인탑(仙仁榻)은 신선이 앉는 의자라는 뜻이다.

 현재 산방산을 탐방하는 가장 대중적인 방법은 산방굴사를 갔다오는 일이다. 산방굴사 탐방로를 제외한 다른 탐방로는 모두 폐쇄돼 있으므로 유일한 탐방 방법이기도 하다. 다르게 생각하면 산방굴사 탐방이 산방산 탐방일 수 있다. 산방산이라는 이름이 방처럼 생긴 이 동굴에서 비롯됐으니 말이다. 동굴 어귀 노송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일출이 장관이라고 했는데, 노송이 재선충에 걸려 지난해 제사를 지낸 뒤 베어내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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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방산 남쪽 자락에만 사찰 3곳이 모여 있다. 이들 세 사찰이 산방굴사를 공동으로 운영한다. 사진은 산방사 모습.

산방산 남쪽 용머리해안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산방굴사로 이어지는 탐방로가 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서면 탐방로 양쪽으로 사찰이 보인다. 산방산 남쪽 아랫도리에만 사찰 3개가 있는데, 종파가 다르다. 맨 왼쪽부터 일붕선교종 광명사, 태고종 산방사, 원효종 보문사가 있다. 이 세 사찰이 돌아가며 산방굴사를 운영한다.

산방굴사의 모습. 10m 깊이의 동굴 안쪽에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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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발 200m 정도 높이 산방산 남쪽 암벽에 산방굴사가 있다. 5m 높이 10m 깊이의 널찍한 동굴 안쪽에 부처님이 남쪽 바다를 보고 앉아 있다. 고려 말 혜일선사가 굴사를 창건했고, 조선 후기 초의선사가 굴사에서 수도했다고 전해진다. 부처상 옆 천장 바위 틈에서 약수가 떨어지는데 여신 산방덕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동굴에 살던 여신 산방덕과 마을 청년 고성목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로, 사또의 음모로 고성목이 죽임을 당하자 산방덕이 동굴로 돌아와 눈물을 흘리다 바위로 변했다고 한다. 그 뒤로 바위에서 뚝뚝 물이 떨어졌고, 마을에서는 이 약수를 ‘산방덕이 눈물’이라고 불렸단다. 약수를 한 국자 떠 마시면 5년을 더 산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굴사 입구 오른쪽 암벽에 산방산을 들른 양반이 새긴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전설에 따르면 산방산과 산방산 아래의 용머리해안은 한 몸뚱어리다. 산방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정말로 산방산에 똬리를 튼 용이 바다로 고개를 내민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중국 진시황의 명을 받은 호종단이 용머리해안 일대가 세상을 평정할 왕이 태어날 지세라는 걸 확인하고 용의 꼬리 부분과 잔등 부분을 칼로 끊었다. 그러자 해안바위에서 피가 흘렀고 산방산이 며칠을 울었다고 한다. 반면에 지질학은 용머리해안이 생긴 다음에 산방산이 생겼다고 설명한다.

산방산 주변은 밭이다. 검은 흙이 깔려 있어서 마늘 농사가 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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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시황의 전설은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산방산 일대는 제주도에서 손꼽히는 명당이기 때문이다. 풍수적으로 산방산은 황금닭이 알을 품은 형세라고 한다. 산방산 아랫마을, 그러니까 안덕면 사계리와 덕수리는 예부터 인물이 많은 마을이었다. 제주지질공원 해설사 김용하(62)씨가 “정치인 · 기업인도 여럿 있지만 특히 교육자가 일대 마을에서 많이 나왔다”고 귀띔했다. 산방산 주변 마을은 부자 마을이기도 하다. 산방산 일대의 흙을 ‘칸흙’이라고 한다. 시커멓게 탄 흙, 다시 말해 흑토다. 이 기름지고 물 잘 빠지는 화산토에 마을 사람은 마늘을 심었고 그 마늘을 팔아 자식들 교육을 시켰다. 요즘도 사계리 특산품은 마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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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에서도 산방산은 다르게 보인다. 산방산 남쪽 자락에 들어앉은 광명사 경내에서 바라본 산방산은 거대한 절벽 덩어리다.

산방산 비탈은 직각에 가까운 절벽이다. 길이 100m가 넘는 주상절리가 병풍처럼 서 있는 지대도 있다. 거의 모든 벽면이 크게 훼손되지 않고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데, 서남쪽 비탈만 무너져 있다. 크고 작은 바위가 가파른 경사를 따라 흩어져 있어 언뜻 너덜지대(돌이 많은 비탈)로도 보인다. 그러나 이 허물어진 비탈은 자연현상과 관계가 없다. 인간이, 그것도 고의로 무너뜨렸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육군은 대구에 있던 제1훈련소를 모슬포로 이전했다. 1951년부터 56년까지 약 5년간 모슬포 일대에 군대가 주둔했는데 병력이 많았을 때는 7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당시 육군의 대포 사격장 표적지로 쓰인 곳이 산방산이었다. 한 지점을 정하고 대포를 쏴야 훈련이 되는데 산방산 말고는 주변에 마땅한 표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 시절에는 어쩔 수 없었다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 없는 역사다.

산방산은 날카로운 바위 봉우리의 모습을 띠기도 한다. 산방산 북쪽 자락 영산암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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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방산은 워낙 유명한 오름이어서 상상만 해도 생김새가 떠오른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는 산방산의 모습은 남쪽, 그러니까 바다 쪽에서 바라봤을 때로 한정된다. 산방산은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북쪽 영산암 경내에서 올려다보는 산방산은 월출산이나 도봉산처럼 날카로운 암봉으로 보인다. 영산암에서 만난 보살은 호랑이가 한라산을 향해 절을 하는 형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호랑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가장 인상적인 모습은 서쪽에서 바라봤을 때의 산방산이다. 영락없는 한라산의 모습이다. 윗세오름에서 바라보는 한라산 정상부처럼 산방산이 당당하게 서 있다. 산방산은 한라산을 가장 빼닮은 오름, 아니 작은 한라산이다.

여행정보

산방산 남쪽 기슭에 주차장이 있다. 입구 바로 아래의 주차장은 사설 주차장으로 주차료를 내야 한다. 1000원.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공영주차장은 도로 아래에 있다. 산방산 입장료도 있다. 어른 1000원. 산방산 아래 용머리해안 탐방를 포함한 입장료는 어른 2500원. 제주도의 지질 자원을 체험할 수 있는 ‘2016 제주 지오(GE0) 페스티벌’이 오는 5∼6일 서귀포시 사계리와 제주시 김녕리 일대에서 열린다. 5일은 산방산 아랫마을 사계리에서 행사가 진행되는데, 산방산 자락에 조성된 지오 트레일을 걷고 마늘잼을 비롯한 로컬 푸드를 체험한다. 제주관광공사 064-740-6071. 제주올레 10코스가 산방산 북쪽 자락을 에두른다.

글ㆍ사진=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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