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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박 대통령, 꼼수로는 돌파할 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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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근혜 대통령의 김병준 총리 후보자 지명은 시작부터 단단히 잘못됐다. 국민이 선거로 맡긴 신성한 국가권력을 최순실 개인에게 상납한 권력 사유화 사건의 주인공이 박 대통령이다. 온 국민을 배신하고 국가 시스템을 파괴했으며 법과 원칙을 우습게 만들었다. 헌법적 권위와 정치적 신뢰가 바닥난 박 대통령이 무슨 염치로 총리 후보자를 일방적으로 지명했나.

김병준, 대통령 수사·탈당 권유·거국내각 제시
국민은 일방 지명한 후보자 내세운 꼼수 의심
대통령이 확인해 주기 전에는 믿을 수 없어

우리는 대통령(President)과 대통령직(Presidency)을 엄중히 구분하고자 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죄는 용납하기 어려워도 국정은 굴러가야 하고 헌정 질서는 유지돼야 한다. 탄핵이나 하야 같은 비상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헌법적 질서, 3권분립의 틀 속에서 국가적 위기를 헤쳐 나가는 게 모두에게 소망스럽다. 그러기 위해 대통령 박근혜의 문제는 조목조목 따지고 철저하게 책임을 묻더라도 그가 수행하는 대통령직을 존중한다는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

어제 김병준 총리 후보자의 기자회견은 박 대통령으로부터 지명을 받았으나 그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문제적 상황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김 후보자는 “개각을 포함해 모든 것을 국회 및 여야 정당과 협의해 나가겠다” “대통령에 대한 수사가 가능하다” “대통령 탈당을 권유할 수 있다”고 밝혔다. ‘국회와 개각 협의’ ‘대통령에 대한 수사’ ‘탈당 요구’는 꺼내기 어려운 단어들이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등 야당이 최순실 정국에서 줄기차게 요구했던 사안이며 새누리당 친박 지도부는 무슨 성역처럼 뭉갰던 이슈들이었다. 김 후보자는 여기에 덧붙여 “경제·사회 영역은 저에게 전부 맡겨줬으면 한다고 얘기했다”며 내치(內治)의 전권을 대통령에게 요구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개헌은 정부가 아닌 국회·국민이 주도해야 한다” “국정 교과서 문제도 이게 과연 합당한지 의문을 갖고 있다”며 과거 박 대통령의 소신과 정반대 입장을 펴기도 했다. 김 후보자가 발언한 대로 진짜 의회 중심의 거국내각이 작동한다면 사실상 유고 상태에 빠진 박 대통령의 대통령직은 보호하면서 그의 비정상적인 국정 행위는 차단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국민들은 박 대통령이 ‘최순실 게이트’ 정국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옛날의 불통 권력을 다시 회복하려는 꼼수가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박 대통령이 보여준 행태가 이런 불신을 낳았다. 결국 김 후보자의 진정성은 임명권자인 박 대통령이 직접 확인해줄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은 오늘 김 후보자가 밝힌 구상들 가운데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다는 식의 구체적 입장을 밝혀야 한다. 그런 뒤에 국회에 총리 인준을 부탁해도 “대통령이 김 후보자의 지명을 철회하고 야당과 협의해 총리를 재지명하라”는 여론의 벽을 뚫을지 의문이다. 일관되게 강조했듯이, 국민에게 거부당한 대통령으로선 검찰 수사를 받고 진상 규명에 협조한 뒤 거국내각의 총리에게 권한을 넘기고 2선으로 물러나는 것이 대혼란 상태에 빠진 국정을 수습하는 정도(正道)다. 꼼수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