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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꼬르동 블루 간 사찰음식…학생들 “20년 묵은 간장 놀랍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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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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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꼬르동 블루’에서 선재 스님(오른쪽 세번째)이 한국 사찰음식 특강을 하고 있다. 목에 삼색 칼라를 두른 국가 공인 셰프인 브로아 오구를트 교장(오른쪽 둘째)과 에릭 브리파 교수가 20년 묵은 한국의 간장을 맛보고 있다. [사진 백성호 기자]

“이건 20년 묵은 간장입니다. 맛을 보세요.”

학생 100명, 교수·교장까지 참석
선재스님 “발효 통해 삶을 배워”
버섯볶음·가지무침 맛 보여줘

국가 명인 셰프 브리파 교수
“원재료 맛 찾는 현대 흐름과 맥 통해”
학생들 “당장 파리 한식당 가볼 것”

지난달 28일 프랑스를 대표하는 요리 학교 ‘르 꼬르동 블루’의 강의실에서 탄성이 터졌다. 사찰음식 대가인 선재 스님이 ‘한국의 사찰음식’이란 주제로 특강을 하면서 묵은 간장을 꺼냈다. 스님은 1년, 5년, 10년 묵은 간장을 학생들에게 시식용으로 건넸다. 그러다 20년 묵은 간장을 꺼내자 “와~아!”하고 일제히 탄성이 터졌다. 세계 각국에서 온 ‘르 꼬르동 블루’의 학생들은 코로 간장 냄새를 먼저 맡고, 혀끝으로 맛을 보며 ‘발효 간장’의 깊이를 음미했다.

이날 강의실은 빼곡했다. 특강을 신청한 약 100명의 학생들이 자리를 다 채웠다. 선 채로 선재 스님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도 꽤 있었다. 학생들 자리에는 펜과 노트를 든 ‘르 꼬르동 블루’의 교수도 앉아 있었다. 직접 요리 시연을 하던 선재 스님은 사찰음식에 담긴 정신을 풀었다. “한국의 사찰음식은 나와 자연을 둘이 아니라 하나로 보는 생명관을 갖고 있다. 불교 경전에는 ‘벌이 꽃에서 꿀을 따올 때 꽃을 해치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다. 사찰음식도 그렇다. 꽃을 해치지 않으면서 자연을 쓰는 요리법이다.”

불교적이고 동양적인 관점이 낯설고도 신선한 듯 학생들은 강의에 집중했다. 선재 스님은 구체적인 조리법에 앞서 ‘무엇을 위한 요리인가?’라는 물음을 먼저 자신에게 던지라고 했다. “입에만 맞다고 음식이 아니다. 기분만 좋아진다고 음식이 아니다. 정말 좋은 음식은 내 몸에 약이 되는 음식이다. 그런 음식을 만드는 이가 최고의 요리사다. 요리의 재료가 어디서 오나? 모두 자연에서 온다. 그래서 요리사는 자연과 인간을 연결하는 중간자다. 여러분이 그처럼 중요한 사람들이다.” 학생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선재 스님은 배추를 한 포기 들었다. “사람들은 이걸 ‘1유로짜리 배추’ ‘2유로짜리 배추’라고 부른다. 불교에서는 이 배추를 ‘얼마짜리 배추’라고 부르지 않는다.” 스님은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이 배추가 자라기 위해서는 하늘의 햇빛, 땅의 흙, 동서남북에서 부는 바람, 땅을 적시는 물 그리고 농부의 손길이 필요하다. 그러니 이 배추가 어디에서 왔겠나. 그렇다. 온우주에서 왔다. 배추 한 포기가 온우주에서 나온 하나의 생명이다.” 그러니 귀하게 대하라고 했다. “사찰음식은 ‘전체식(全體食)’을 지향한다. 식재료를 버리지 않는다. 가능한 모두 먹으려고 한다. 음식은 우주에서 온 생명이기 때문이다.”

선재 스님은 버무린 김치와 제피를 얹은 호두, 버섯볶음, 가지무침 등을 요리해 학생들이 맛보게 했다. 프랑스 학생 나탈리 보넬(28·여)은 “낭비하지 않고 식재료의 모든 걸 쓴다는 말이 무척 인상적이다. 채소가 자라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시간이 걸리는지 다시 돌아보게 된다”고 말했다. 폴란드에서 왔다는 보이체크 쿠비차(30·남)는 “한국 음식은 처음이다. 신선한 배추와 매운 맛의 조화가 놀랍다. 당장 파리 시내에 있는 한식당을 찾아가 볼 생각”이라고 했다. 캐나다에서 온 루비 수(29·여)는 세 단어로 사찰음식의 느낌을 표현했다. “신선하고(freshing), 건강하고(healthy), 평화롭다(peaceful). 한국 사찰음식에 담긴 철학이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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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요리학교 ‘르 꼬르동 블루’ 학생들이 잔에 담긴 1년, 5년, 10년된 간장을 차례대로 맛보고 있다. [사진 백성호 기자]

강의 말미에는 질문이 쏟아졌다. “간장이나 된장, 김치는 발효음식이다. 왜 발효가 중요한가?” 선재 스님은 “우리 몸은 생명이다. 식재료도 생명이다. 생명과 생명이 만나면 충돌이 생길 수도 있다. 둘을 조화롭게 연결시키는 고리가 ‘발효’다. 음식의 발효를 통해 우리는 삶의 지혜까지 배운다.” 때로는 요리가 스승이 된다고 했다.

‘르 꼬르동 블루’의 교수진에는 프랑스 정부에서 인정한 ‘국가 명인’도 있다. 최고 중의 최고로 꼽히는 셰프다. 그들이 입고 있는 요리사복의 목칼라에는 프랑스 삼색기를 상징하는 파랑, 하양, 빨강의 선이 있다. 프랑스인들은 그것만 봐도 보면 존경을 표한다고 했다. 그런 삼색기를 목칼라에 두른 셰프 에릭 브리파(55) 교수는 “오늘날 파리든 뉴욕이든 음식이 원재료의 맛을 찾아가는 큰 흐름이 있다. 좋은 음식은 단순(simple)하다. 요즘은 돈만 있으면 뭐든지 가질 수 있고, 뭐든지 할 수도 있다. 그런데 행복은 거기에 있지 않더라. 음식에 비유하자면 단순한 걸 찾는 게 진정한 행복이더라. 한국 사찰음식에 깔린 정신은 가장 주목받는 현대적 트렌드와 맥이 통한다”고 말했다.

옆에 서 있던 브로아 오구를트(63) 교장도 ‘국가 명인 셰프’다. 그는 20년 묵은 간장을 맛 본 소감을 밝혔다. “일본과 중국에서도 간장을 많이 먹어봤지만 이보다 더 맛있는 간장을 먹어본 적이 없다. 이게 간장인가 싶었다. 하나도 짜지 않았다. 오랜 세월 묵힌 밀레니엄 와인과 똑같다고 볼 수 있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 있는 음식이다. 한 마디로 놀랍다”고 말했다.

오구를트 교장과 브리파 교수는 선재 스님을 ‘르 꼬르동 블루’의 옥상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학교에서 직접 가꾸는 유기농 텃밭이 있었다. 거기서 딴 방울 토마토와 딸기, 호박과 당근, 각종 허브를 요리 실습 재료로 쓴다고 했다. 채소를 한아름 따다가 선재 스님에게 안겨 준 오구를트 교장은 “미국을 중심으로 GMO(유전자변형생물) 제품이 상업적으로 대량생산되고 있다. 따라서 음식에 대한 우리의 불신도 커지고 있다. ‘자연 그대로’에 담긴 가치를 깨닫는 게 정말 중요하다. 사찰음식에는 자연을 향한 존중이 담겨 있다”며 선재 스님을 ‘명예 대사’에 위촉했다. 선재 스님은 29일 ‘르 꼬르동 블루’와 함께 프랑스 양대 요리학교로 꼽히는 ‘에콜 페랑디’에서도 사찰음식 특강을 했다.

‘한불수교 130주년’을 맞아 지난달 24~30일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은 문화사업단을 이끌고 파리를 방문했다. 사찰음식 특강은 이 행사의 일환이었다. 조계종은 ‘1700년 한국전통산사와 수행자의 삶’ 행사를 열고 프랑스 문화계 주요 인사들을 초청해 사찰음식 만찬도 가졌다. 자승 스님은 자크 랑 전 프랑스 문화부 장관과 대담을 갖고, 수덕사 방장 설정 스님은 파리의 이날코 대학에서 한국불교 강연을 했다. 강연 직후에 “출가하고 싶다”며 프랑스 학생이 찾아오기도 했다.

◆르 꼬르동 블루

1895년 파리에 설립된 프랑스의 대표적인 요리 학교. 프랑스 궁정과 귀족 등 상류층의 요리가 프랑스 혁명을 거치며 대중화됐다. 그 중심에 ‘르 꼬르동 블루’가 있다. 국내에도 분교가 있다.

파리=글·사진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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