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슈 클릭] 강남 엄마들은 왜 역술가 앞에 앉았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4면

| 진로·적성 상담소가 된 점집

기사 이미지

한 학부모가 사주상담소에서 자녀의 진로를 조언받고 있다. 과거 ‘점집’으로 통했던 곳이 이젠 전문 ‘멘토링’업체로 대우받고 있다.

최근 서울 강남 일대에 사주팔자나 손금 등으로 자녀 진로를 상담해주는 곳이 늘고 있다. 과거엔 믿거나 말거나 ‘점집’으로 불렸지만 이제는 자녀상담 전문‘멘토링’업체로까지 인정받는 분위기다. 그렇다보니 일부 극성 부모는 태어난 지 1~2년밖에 안된 자녀의 손금을 보러 손금 전문가를 찾기도 한다. 그동안 비과학적인 분야로 여겨졌던 점집이 강남 학부모 사이에서 이렇게 급부상한 이유는 무엇일까. 명암을 두루 따져봤다.

명문대 박사 출신 30~40대 사주가 등장
명리학 데이터와 현대적 통계 접목하기도
“ 사주팔자는 예언 아니므로 참고만 해야”

기사 이미지

사주팔자, 인생 집적해놓은 ‘빅데이터’

강남에서 사주상담소를 운영하는 고훈(59)원장은 15년 경력의 역리학자다. 강북에서 사주상담소를 운영하던 고 원장은 자녀 상담을 해오는 강남 학부모가 점점 늘자 지난해 강남에 분점을 냈다.

고 원장은 통념을 뛰어넘는 해결책으로 인기를 얻었다. 예컨대 컴퓨터 게임에 빠진 자녀를 둔 학부모에게 “(아이에게)최신식 컴퓨터를 사주고 메일 게임을 하게 해라. 정식으로 프로게이머에게 게임을 베우게 하는 것도 좋다”고 조언한다. 또 전교 상위권에 드는 우등생 자녀를 둔 부모가 명문 특목고에 보내도 좋겠느냐고 물으면 “강북의 일반고에 보내라”고 하는 식이다.

고 원장은 “사주에 나타난 기질에 따라 조언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게임에 푹 빠졌던 그 아이는 지능과 집중력이 굉장히 뛰어났다”며 “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파서 대성하는 기질을 가졌기 때문에 자신이 하고픈 일에 전념해야 잘풀린다”고 설명했다. 일반고 진학을 추천한 아이에 대해선 “공부는 잘하지만 오만한 성격을 가진 케이스”라며 “특목고에 입학하는 것보다 일반고에서 다양한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는 게 훗날을 위해 좋다”고 풀이했다. 오만한 기질을 가진 아이가 엘리트 집단에서만 지내다 보면 장래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란다.

13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철용(69) 통연구소장은 “역리학의 사주팔자는 인간의 운명을 확률 통계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일종의 경험철학”이라며 “사주팔자엔 사람의 출생을 나타내는 60갑자와 음양오행을 결합한 조합이 약 50여 만 건이 집적돼 있다”며 “사람의 성향과 미래 성패를 예측할 수 있는 이유”라고 했다.

날씨처럼 달라지는 손금·관상

기사 이미지

사주팔자가 사람 기질을 파악하는 큰 틀이라면 손금·관상은 이 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추정할 수 있는 미시적인 지표다. 손금·관상을 보는 이정표(47) J2대표는 “사주팔자는 바뀌지 않지만 손금과 관상은 날씨처럼 시기 별로 변한다”고 말했다. 자신감 넘치는 성격을 가진 사주도 시기에 따라 때론 오만해질 수도, 또는 유순해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얼마 전 이 대표를 찾아온 한 학생은 지난해부터 집중력을 나타내는 손금이 점점 희미해졌다고 한다. 이유를 알아보니 스마트폰 중독 때문이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어지다보니 학교 성적도 덩달아 떨어졌다. 이 대표는 이 학생에게 탁구를 권했다. 작은 탁구공에 집중하며 몸을 움직이게 함으로써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것이다. 실제로 탁구를 치면서부터 이 학생은 스마트폰 사용량이 크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여러 분야에서 재능이 뛰어날수록 대학 입학을 앞두고 부모와 갈등을 빚는 사례도 많다. 3년 전 한 고등학교에서 전교 2등을 하던 학생이 갑자기 자퇴 선언을 했다. 공부에 흥미가 떨어졌다는 게 이유였다. 성적에 맞춰 법대를 보내려던 부모는 당황했다. 영문을 몰라 속이 타들어간 부모는 이 대표를 찾아왔다. 이 대표는 당시 “손금 상으로 두뇌선과 운동선 모두 뚜렷하다”며 “굳이 법대를 고집하지 말고 경영학과에 보내 스포츠 매니지먼트를 시키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 결국 이 학생은 서울의 명문 사립대에 진학했고 현재 유학을 가서 스포츠경영을 배우고 있다. 부모의 희망대로 학업을 이어가면서도 본인 적성을 찾았다는 얘기다.

점집에도 전문화 바람

진료과목마다 각기 다른 전문의를 둔 의사처럼 국내 ‘역리학·사주상담’시장에도 전문화 바람이 불고 있다. 사주 같은 동양철학을 토대로 상담을 받으려는 수요가 느는 데 발맞춰 맞춤형 상담을 제공하는 곳이 속속 생겨나는 것이다. 과거 60~70대 남성이 역리학자와 사주가라는 이름의 ‘점장이’로 활동했다면 최근에는 30~40대 명문대 박사 출신의 젊은 사주가들이 늘고있다. 양복을 잘 갖춰 입는 건 기본이다.

노해정(46) 휴먼멘토링 대표는 ‘명리학 멘토링’의 선두주자다. 경제학 박사를 받은 엘리트 명리학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그가 업계의 주목을 받은 건 사주상담 자료를 토대로 사회괴학적 데이터를 만들면서부터다. 상담을 받은 10대 청소년 1100여명을 대상으로 실제 사주에 따라 진로가 어떻게 결정됐는지를 5~10년동안 추적했다. 이렇게 사주학을 현대적 통계와 접목시켜 ‘인간 분석학’을 만들어냈다.

노 대표는 “학문의 틀을 그대로 현실에 적용할 경우 자칫 잘못된 진로를 조언해줄 수 있다”며 “이런 실수를 최소화하기 위해 과학적인 데이터를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글로벌 시대인 만큼 사주팔자를 한국식으로만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문과 성향이라고 하면 법대, 이과 성향이라고 하면 무조건 의대로 보내선 안된다는 얘기다.

사주 열풍의 배경

전문가들이 분석한 사주의 인기는 적성 찾기 때문이다. “이제는 취업이나 명문대 진학을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 적성에 맞는 공부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한국교육개발원이 성인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자녀교육의 성공 기준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자녀가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을 하게 이끄는 게 성공’이라고 답한 비율은 2010년 13.5%에서 지난해 21.9%로 크게 상승했다.

김두환 덕성여대 사회학과 교수는“명문대에 입학해도 취업이 안되자 자녀의 적성을 찾아주려는 부모의 노력이 사주상담 열풍으로 이어졌다”며 “사주를 통해 적성을 찾으려는 노력 자체는 나쁘다고 할 수 없으나 상담가의 조언을 맹신하지는 말라”고 당부했다. 이철용 소장도 “사주상담은 미신에 의존하는 운명학이 아닌 통계에 의한 관리학”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주팔자는 확률상 어떤 성향이 높다는 설명에 불과하고 예언은 아니므로 참고만 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글=김포그니 기자 pognee@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