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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여성 리더십의 약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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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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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논설위원

“여자들 리더십을 믿을 수 있나.” “여성 대통령은 다신 못 나온다.”

정서적 강점 부각하는 여성 리더십
자칫 측근만 챙기는 폐해 경계해야

요즘 주변 남성들은 예전엔 조심했던 여성 리더십에 대한 비아냥을 방언이라도 터진 듯 쏟아놓는다. 농담인 척하지만 진담으로 들린다. 논리적으론 문제가 많다. 하나 심정적으론 이해가 되니 반박을 자제하고 때론 “같은 여성으로 미안하다”고 대꾸한다. 여성 선후배들도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의 국정 농단 게이트가 터진 후 괜히 민망하고 쪼그라드는 느낌이라고 했다. 여성들의 유별난 연대감 때문이다. 박 대통령과 최씨는 여성 리더십을 허무한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지난 대선을 전후로 여성 집권자들은 어떻게 성공하고 실패하는지 역사를 들춰보며 공부했었다. 그때 찾은 결론 하나는 ‘측근에 대한 경계’였다. 측근정치는 남성 권력에서도 있지만 여성의 측근정치는 공적인 제도와 질서를 무시하고 흔들면서 고집불통으로 밀어붙이는 짜증나는 아줌마 스타일이 있었다. 중국 최초의 여성 집권자 여태후와 유일한 여성황제 측천무후가 그랬다.

둘은 민생을 안정시켰고 외세의 침략에 적절히 대응하며 나름 치세를 이끌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태후와 더불어 중국의 3대 악녀로 꼽힌다. 여태후는 남편인 한고조가 세웠던 ‘유씨만 왕이 된다’는 질서를 꼼수로 뒤엎고 친족인 여씨들을 왕으로 봉했다. 측천무후는 친아들을 죽이고 무씨 왕조를 이으려 했고 밤시중을 드는 두 명의 남창(男娼)에게 정치개입을 허용해 정변을 자초했다. 사적 인연이 공적 영역을 장악하며 공사(公私)가 뒤섞이는 정치적 혼란을 불렀고, 측근을 비호해 방자한 행동의 빌미를 줬으며, 정적에겐 잔혹했다. 그 결과 그의 실권 혹은 사후엔 권세를 부렸던 측근과 친정식구 등이 몰살당하는 참극이 일어났다.

여성 리더 측근의 폐해는 현재진행형이다. 박 대통령이 증명했고, 힐러리 클린턴도 미국 연방수사국이 e메일 스캔들 재수사에 나서면서 다시 시험대에 섰다. ‘힐러리랜드’로 불리는 측근정치가 핵심이다. 힐러리가 국무장관 시절 개인 e메일로 측근들과 은밀히 소통하며 국가 기밀을 유출했다는 의혹. 박 대통령이 한 일을 영민한 힐러리도 했다는 것이다. 2008년 대선 경선에서 힐러리가 오바마에게 패한 것도 ‘정실주의’ ‘비밀주의’ 때문으로 지적된다.

흔히 여성 리더십은 전제적·가부장적 남성 리더십과 달리 민주적·상호작용적·관계지향적이어서 권력분담과 배려를 중시하는 조직문화를 만들어 효율성을 높인다고 한다. 정서적 능력이 여성 리더십의 강점이라는 거다. 하나 감성의 효율은 잘 하면 그렇다는 거다. 박 대통령의 정서적 리더십은 불통·권력독점으로 흘렀다. 자신만의 좁은 원칙과 독선에 갇혀 속 터지게 하는 여성 리더들은 심심찮게 많다. 최순실 게이트처럼 측근과만 소통하는 ‘정서적 의존성’이 강하면 권력자의 감성에 줄을 댄 방자한 측근들이 출몰한다. 관계지향성이 친밀함에 맞춰지면 이너서클만 챙기는 우물안 개구리가 되기 십상이다. 합리적·논리적이 아닌 정서적 리더십은 이렇게 위험할 수 있다는 얘기다.

최근 우리나라에선 여성 리더십의 위기가 사회 혼란으로 확대된 사례가 많았다. 최순실 게이트는 가장 어두운 면을 날것으로 드러냈다. 이는 최악의 상황이지만 우리가 여성 리더십의 약점을 직시하는 계기로 삼는다면 그나마 의미 하나는 건질 수 있을 거다. 리더를 꿈꾸는 여성은 먼저 자격을 갖춰야 한다. 좋은 야망의 조건은 일정 수준 이상의 일의 숙련도(mastery)와 공적인 인정(recognition) 위에 구축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격을 갖추기 위한 부단한 학습과 숙련, 단계적인 성취를 이루며 공적 인정을 받는 과정 없이 ‘대통령 딸이니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식의 허황한 토대에서 발현된 공주병적 야망은 세상을 병들게 한다. 여성 리더십은 그 자체로 우수하지 않다. 세상을 이롭게 할지 병들게 할지는 여성 스스로 감성적 환상을 버리고 자신을 단련하는 고통의 시간을 얼마나 감내하느냐에 달렸다.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