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의 재발견】 : 요약(68)

중앙선데이

입력

경남 거제시 둔덕면 거림리 둔덕기성. 고려 의종이 왕에서 쫓겨난 뒤 3년간 유폐된 곳이며 폐왕성으로도 불린다. 송봉근 기자

고려왕조의 최대 정변인 무신의 난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것이 우리 학계의 대세다. ??

“의종은 환관 무리와 놀러 다니는 일로 날을 보내어 정치를 돌보지 않았다. 국정은 어지럽고 기강은 땅에 떨어졌다. 문신들과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내고, 무신을 혹사하고 천대한 결과 마침내 무신의 대란(大亂)을 도발케 했다.”(김상기, 『고려시대사』, 1984). ??


연회에 빠져 국정 혼란과 기강을 무너뜨리고, 문신을 우대하고 무신을 천대한 의종(毅宗; 1146~1170년 재위)에게 정변의 책임을 묻고 있다. 그런데 정설(定說)과 다름없는 이 견해는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 기록을 옮겨 놓은 것이다.

“사신(史臣) 유승단(兪升旦)이 말한다. ‘불행하게도 의종은 아첨하고 경박한 무리들을 좌우에 두고 재를 올리고 기도하는데 재물을 기울여 탕진했다. 정치에 쏟아야 할 시간과 정력을 주색(酒色)에 빠져, 풍월을 읊는 것으로 정치를 대신했다. 이로써 점차 무신의 노여움이 쌓여 화(禍: 정변)가 일어났다’라고 했다.”(『고려사절요』 권11 의종 24년 8월 사평(史評)) ??


?학계의 견해는 『고려사』에 실린 유승단의 의종 평가와 판박이다. 그런데 당시 실록 편찬에 참여한 유승단은 무신정변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처지가 아니었다. 무신권력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의종실록 편찬 자체가 출발부터 왜곡되었다.

“어떤 사람이 무신정권 최고기관인 중방(重房)에 다음과 같이 고발했다. ‘(의종실록) 편찬자 문신 문극겸(文克謙)은 의종이 피살된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국왕 시해는 천하의 가장 큰 죄입니다. 무신으로 사관(史官)을 교체해 사실대로 쓰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왕[명종]도 어쩔 수 없이 무신 최세보(崔世輔)를 사관으로 임명했다. 최세보는 마음대로 사실을 고쳐 (의종)실록을 편찬했다. 이 때문에 실록에는 탈락되고 생략된 사실이 많았다.”(『고려사』 권100 최세보 열전) ??


의종실록은 무신정변이 일어난 지 약 20년이 지난 뒤 무신정권의 안정기에 편찬되었다. 그 때문에 무신들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변의 책임을 의종의 실정(失政)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의종 시해 사실처럼 무신들에게 불리한 사실이 많이 생략되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기록된 유승단의 의종 평가도 온전할 리 없다. 따라서 무신정변의 원인에 관한 과거와 현재의 기록은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의종이 태자로 있을 때 국왕[인종]은 태자가 장차 왕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왕후 임씨도 둘째 아들 왕경(王暻)을 사랑해 그를 태자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태자(훗날 의종)의 스승 정습명(鄭襲明)이 충성으로 태자를 가르치고 보호해 폐위되지 않았다.”(『고려사』 권96 정습명 열전)


?


?정습명은 당시 김부식과 함께 문신귀족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다. 부왕인 인종과 모후를 등에 업은 외척들은 도량이 있고 따르는 사람이 많은 차남 왕경(王暻)을 왕위에 앉히려 했지만 ‘장자 계승’을 주장한 정습명으로 상징되는 문신귀족의 명분에 밀려 의종이 즉위한 것이다. 의종은 즉위 후 묘청 난을 진압해 정치의 주도권을 쥔 김부식?정습명 등 유교 관료집단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어, 사실상 이들에게 포위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1151년(의종5) 김부식과 함께 자신을 보필한 정습명이 죽은 뒤엔 자신의 구상대로 정치를 한다.


?


정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168년(의종22) 의종은 서경에 행차하여 자신의 통치철학을 담은 이른바 ‘신령(新令)’을 반포하여, 음양사상·불교·선풍(仙風: 도교)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운다. ‘왕조의 중흥’이 의종이 바라던 정치 세계였다. 의종은 문신귀족과 달리 왕권을 강조한 절대 군주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의종의 정치를 보좌한 세력은 내시집단, 환관과 술사(術士: 풍수지리에 밝은 사람), 의종을 호위한 친위 군사집단의 세 그룹이다. 반(反)문벌귀족 세력이란 공통점을 지닌다. 내시는 조선시대와 달리 국왕의 정치를 보좌한 신진기예의 관료집단이다. 일반 군인은 어느 때나 고역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의종을 호위한 친위군사인 상급 무신은 비록 정변을 일으켰지만, 평소 의종의 우대를 받았고 의종을 지지한 측근 그룹의 하나였다. 의종은 무신을 천대하지 않았다. ? ??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1790년 편찬)에 실린 수박희(手搏戱) 모습.

권력은 결코 나눠 가질 수 없다. 그로부터 나타난 폐단이 측근 그룹 가운데 내시, 환관과 술사그룹, 친위 군사그룹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나타난다. 무신정변은 일차적으로 측근세력 내부의 권력 다툼에서 시작되었다.

“왕이 보현원(普賢院)에 가기 위해 오문(五門) 앞에 도착했다.… 왕은 무신들이 실망하지 않게 위로하기 위해 수박희(手搏戱: 태권도의 일종)를 하게 했다. 내시 한뢰(韓賴)는 (왕을 호위하는) 무신들이 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시기했다. 마침 대장군 이소응이 수박희를 하다 힘이 부쳐 달아나자, 그의 뺨을 치고 비웃었다. 내시 임종식·이복기 등도 이소응을 모욕했다. 정중부 등은 ‘이소응이 비록 무신이나 벼슬이 3품인데 어찌 이렇게 욕을 보이는가?’하고 소리를 질렀다. 왕이 정중부를 달랬다.”(『고려사』 권128 정중부 열전)

?


무신정변이 일어난 날 낮에 벌어진 일이다. 왕은 수박희를 열어 친위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려 했는데, 왕의 총애를 다투던 내시 출신 한뢰·이복기·임종식 등이 그 참에 불을 지른 것이다. 친위 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린 일반 군인과는 처지가 다른, 국왕의 총애를 받은 집단이다. 모욕을 당한 이소응과 정중부는 국왕을 호위하는 친위 군사 출신이다. 모욕 사건이 발생한 그날 저녁 마침내 정변이 일어났다. ? ?정중부와 함께 최초의 정변을 일으킨 이의방·이고 등도 역시 의종을 호위한 친위 군사였다. 이렇듯 정변은 일차적으로 측근 그룹인 정중부 등 친위 군사들이 내시 환관과 또 다른 측근 그룹을 제거하면서 일어난 것이다. 그날 저녁 의종은 친위 군사들의 호위를 받아 왕궁으로 돌아와 보현원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피해를 입은 내시 환관 등이 다시 반발하자, 무신들은 의종을 거제도로 유폐한 후 환관과 내시들을 무더기로 제거한다. 3년 후인 1173년(명종3) 김보당을 주모자로 한 문신들이 거제도에 유폐된 의종을 경주로 모셔와 복위운동을 일으켜 무신에게 저항하자 마침내 이 정변은 문신들에 대한 대량 학살로 확대되었다. ??


당시 역사가들은 무신정변을 ‘경계(庚癸)의 난’이라 했다. 즉 최초 정변이 일어난 경인년(庚寅年: 1170년)과 복위운동이 일어난 계사년(癸巳年: 1173)의 두 차례 정변을 합해 무신정변이라 했다. 최초의 정변은 의종 측근세력 내부의 권력 다툼이며, 그런 빌미를 제공한 의종에게 일단의 책임이 있지만 의종의 책임은 여기까지였다. 두 번째 정변인 의종 복위 운동이 일어날 때 일반 군인들의 호응 아래 무신들은 문신에 대한 대량 살육을 저질렀다. 의종의 손을 떠난 정변이다. ? 무신정변은 가까이는 왕실 중흥과 왕권 강화를 시도한 의종과 그에 반대한 문신 관료집단 사이의 대립이라는 파행적인 정치로부터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멀리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등 12세기 이래 누적된 지배층 내부의 대립·갈등의 산물이 끝내는 무신정변이란 파국을 초래했다.


?500년(918∼1392년)의 고려 역사에서 100년쯤은 무신정권(1170~1270년) 시대다.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 초기 역사가들은 ‘고려왕조 멸망의 계기는 무신정권 때부터’라고 혹평했다. 그렇지만 무신정권 붕괴 후 고려왕조는 120년이나 더 지속한다. 다양한 고려의 역사를 너무 단순화해 버렸다. 무신정권을 혹평한 까닭에는 당시의 권력자 이의민(李義旼·1184∼1196년 집권)도 포함된다. 그는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전까지 250년 고려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의 한 사람이다. 국왕과 관료집단 중심의 왕정 체제를 없애고 새로운 세상을 꿈꾼 혁명가였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없다’라는 기치를 내세워 1198년(신종1)에 일어난 만적(萬積)의 난도 이의민이 뿌린 씨앗에서 발아한 데 불과하다. 그는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무신의 전형적인 기질을 지닌 인물이었다. ? ??

『고려사』 반역전에 실려 있는 이의민 열전의 일부분.

경주 출신인 이의민은 천민이었다. 이의민은 8자나 되는 큰 키에다 힘이 세어 두 형들과 마을에서 횡포를 부리다 안렴사(조선의 관찰사 격) 김자양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두 형은 죽었으나 그만 살아남았다. 김자양은 그의 완력을 보고 경군(京軍:개경방어 군인)으로 선발했는데, 그것이 인생의 커다란 전기가 되었다. 경군이 된 그는 타고난 완력으로 수박희(手搏戱:태권도의 일종)를 잘해 국왕 의종의 총애를 받아 단숨에 별장(別將:정7품 벼슬)으로 승진한다. 결정적인 기회가 그에게 찾아왔다. 1170년 무신정변이 일어나자 그는 크게 공을 세워 장군(將軍:정4품)으로 승진한다. 장군은 1000명의 군사를 지휘하는 무반의 고위직이다.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본 무신정변이 그에게는 도약의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의종 시해의 죄과는 그를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아넣고,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된다. 1179년(명종9) 정중부를 제거한 무신 경대승(慶大升)은 왕정 체제를 부활하려 했다. 그러면서 국왕을 시해한 이의민을 제거해야 할 첫 번째 인물로 규정한다


1193년(명종23) 경주 인근 운문사(雲門寺:경북 청도군 소재)의 김사미(金沙彌)와 초전(草田:경남 밀양시)의 효심(孝心)이 봉기하자 사령관 전존걸(全存傑)은 장군 이지순(李至純) 등을 거느리고 진압에 나섰다. 이의민의 아들 이지순은 반적들에게 몰래 정보를 주고 의복과 식량 등을 보냈다. 반적들도 금은보화를 그에게 뇌물로 보냈다. 이 때문에 진압군은 이길 수 없었다. 이의민의 아들인 이지순의 단순한 탐욕이 아니었다. 이의민이 반군과 내통하여 새 왕조를 건국하려는 야망을 품었던 것이다. 이의민은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새로운 시대를 갈망한 유일한 무신 권력자였다. 김사미와 효심의 봉기가 진압된 후인 1196년(명종26) 4월 이의민은 냉정한 권력자이자 또 다른 야심가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제거된다. ? ?최충헌의 집안은 부친과 외조부 모두 상장군 출신인 무반 가문이었다. 그 덕에 그는 과거를 거치지 않고 음서의 혜택으로 관료가 되었다무신정변으로 무신이 득세하자 자신의 출세에 유리한 무반으로 관직을 바꾼다. 1174년 서경에서 일어난 조위총의 난을 진압해 별장(정7품 벼슬)으로 승진한 후 안동부사(副使)와 안렴사를 거쳐 행정 경험을 쌓았다. 이의민의 미움을 받아 관리생활을 포기하다, 1193년 장군(정4품)에 임명되어 다시 정계에 등장한 후 3년 만에 이의민을 제거하고 최고 권력자가 된다.


?


최충헌은 아들에서 증손자까지 ‘이(怡)-항(沆)-의(?)’로 이어지는 62년간(1196∼1258년)의 최씨 정권을 열었다. 그 비결은 변혁을 바라지 않은 국왕과 관료집단의 여망을 정확하게 꿰뚫은 현실주의 정치이념이었다. 그는 이의민과는 다른 정치이념으로 정권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었다.


고려의 최고 문장가 이규보(李奎報ㆍ1168∼1241년)는 37세 되던 해(1204년) 재상 최선(崔詵)에게 벼슬자리를 얻으려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선비가 벼슬을 하는 것은 구차하게 일신의 영달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배운 것을 정사에 반영하여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길을 찾고 왕실에 힘을 보태 길이 이름을 남기고자 합니다. …인생은 백세라지만 칠십을 사는 사람이 드뭅니다. 삼십에 벼슬에 오르더라도 오히려 늦다고 하는데, 제 나이 지금 삼십칠 세입니다. 어릴 때부터 쇠약하고 병이 많아 삼십사 세에 흰 털이 보이더니 뽑아도 다시 나기를 그치지 않아 지금은 반백입니다.”(『동국이상국집』 권26 재상 최선에게 올리는 글) ??


23세 때(1190년) 과거에 합격했지만 14년 동안 백수로 지내다 보니 머리조차 반백(半白)이 되었다는 구차한 얘기도 담겨 있지만, 벼슬자리 하나 얻으려는 그의 절박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후에도 이규보는 4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무신정권 당시 과거 합격자들의 일반적인 처지가 이규보와 비슷했음은 다음의 통계 자료가 뒷받침한다. ? 고려 500년 동안 과거 합격자(최종 시험인 예부시 합격자)는 현재 확인된 바로는 6735명이다. 무신정권 100년간 합격자는 전체의 33%인 2229명이나 된다. 기간을 감안할 때 산술적으로 20% 정도가 정상일 것이다. 과거와 별 인연이 없어 보이는 무신의 시대인 점을 감안하면 그 이하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전체 합격자의 33%가 이때 배출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 기간에 1회 평균 선발인원은 34.9명(전체 평균 27.7명)이었고, 시험간격은 평균 1.4년(전체 평균 1.7년)으로, 무신정권 때 더 자주 과거를 치르고, 더 많이 뽑았다는 얘기다. 합격자 숫자가 많아지면서 관직 대기자 숫자는 1205년(희종1) 452.5명, 1210년(희종6) 461.1명, 1215년(고종2) 525.8명으로 늘어난다(*소수점은 평균사망률 적용 때문). 고려왕조 건국 후 가장 심한 인사 적체 현상이 생긴 셈이다(허흥식, 『고려 과거제도사 연구』, 1981년). ? 왜 무신 권력자들은 과거를 자주 치르고, 시험 때마다 합격자 수를 늘렸을까? 그 이유는 과거 지망생들에게 희망을 주어 정권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신정권은 천거를 통해 정권에 철저하게 충성하는 자를 가려내었다. 정권에 충성을 다하는 인물이 바로 무신 권력자가 바라는 관료상이었다. 그래서 천거야말로 관리가 되는 가장 쉽고 빠른 길이었다. 그러나 천거는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최고 권력자 최충헌은 이규보를 세 번이나 만나 그의 자질을 시험한다. ??


1231년 8월 몽골군이 고려를 침입한다. 최고 권력자 최이는 1232년(고종19) 6월 마침내 200년 도읍지 개경을 버리고 강화도에 천도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그 선봉에 선 이가 유승단(兪升旦ㆍ?∼1232년)이다. 유승단은 강화도 천도에 강력하게 반대한다. 천도 두 달 후인 8월 유승단은 사망하는데, 그의 사망 역시 예사롭지 않다. 민심도 천도에 대해 냉담했다. 이규보는 천도를 강행해 정권을 유지하려는 권력자 최이의 의중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는 천도에 찬성하는 글을 올린다.

“도읍을 옮기는 일은 하늘로 오르기만큼 어려운 일, 마치 공을 굴리듯 하루아침에 옮겨왔네. 천도 계획을 서두르지 않았으면, 우리 삼한은 이미 오랑캐의 땅이 되었을 것일세. 쇠로 만든 듯이 크고 단단한 성과 그 주위를 둘러싼 물결, 그 공력을 비교하자면 어느 것이 더 나을까? 천 만의 오랑캐 기마병이 새처럼 날아온다 해도, 눈앞의 푸른 물결을 건널 수 없으리.”(『동국이상국집』 권18)?


이규보는 바다에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인 강화도로 천도하지 않았다면 삼한은 벌써 오랑캐의 땅이 되었을 것이라며 천도를 옹호했다. 이규보는 천도 이듬해인 1233년 재상이 된다. 초고속 승진이다. 왜 무신권력자가 천거제를 통해 관료를 충원했는지 알려주는 좋은 사례이다. 이러한 인사정책은 무신정권이 100년이나 유지된 원인의 하나로 작용했다.


?


- 박종기, 「고려사의 재발견」, 제347호 2013년 11월 8일, 제348호 2013년 11월 10일, 제349호 2013년 11월 17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