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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통찰과 몽상 사이, 직관과 망상 사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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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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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
소설가

소설가라는 직업은 상상력이라는 정신 기능을 주요 도구로 사용한다. 이성적 판단, 논리적 사고도 필요하지만 그것은 토대일 뿐 작품의 구체적 형상은 상상력을 빚어 만들어낸다. 상상력이 원활히 전개되는 조건을 찾아다니던 습작기부터 의문이 있었다. 상상의 결과물이 몽상·환상 등과 구분되는 지점은 어디인가. 번득이는 통찰과 별빛 같은 몽상, 고요한 직관과 자폐적 망상의 경계는 어디인가.

정신의학에서 ‘환상’은 현실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쳐 피 흘리는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어기제로 분류된다. ‘몽상’이나 ‘백일몽’ 역시 현실의 어려움으로부터 도피해 숨는 대표적인 장소다. 소설가가 된 후 알아차린 사실은 유년기부터 사용해 온 방어기제가 그대로 직업 도구가 됐다는 점이었다. ‘망상’은 온전한 현실 검증력이 결여된 인지 왜곡 상태를 의미한다. 상상력을 사용하는 직업이 환상과 망상 기능을 은밀히 강화시켜 마침내 정신분석을 받는 지점까지 이어진 게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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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에서 “통찰은 자신의 문제나 상황의 본질을 이해하는 능력 또는 그 행위를 의미한다. 분석 치료 과정에서 ‘아하! 경험’이라 불리는 섬광 같은 이해를 뜻하며 치료적 변화를 이끄는 필수 요소로 간주된다.” 방어기제가 해체되고 저항이 해석되면 통찰이 뒤따른다고 한다. “직관은 오랜 시간 동안 관찰된 많은 사실을 조용히 전의식적으로 조직화하고 통합함으로써 빠르고 갑작스러운 이해에 도달하는 능력을 일컫는다.” 직관을 통해 획득된 지식은 의식적·객관적으로 검증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나의 정신분석 작업이 효과적이었다면 그 역시 상상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상상력과 함께 통찰과 직관 능력도 발달해 왔을 거라 믿고 싶다.

상상력을 사용하는 직업은 위험한 줄타기 같은 데가 있다. 상상이 잠깐 한눈팔면 영적 스승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환상처럼. 상상이 욕심내면 사이비한 길이 열렸다, 몽상처럼. 의존성을 끊어내지 못했다면 그 길을 한참 걸었을지도 모른다. 잘못됐음을 알아차린 후 제자리로 돌아오기 위해선 혈투 같은 자기와의 싸움이 필요했다. 이후 내게는 정신 작용의 결과물을 검증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것이 현실 원칙에 부합되는가, 공동체의 질서와 통념에 수용될 만한가, 인류의 보편적 선에 부합되는가, 세 차원에서 점검한다. 칼럼 주제와 거리가 먼 이야기를, 오늘 아침, 어떤 상상력에 이끌려 쓰고 있는지 또다시 점검해 봐야겠다.

김형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