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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억새꽃 하얀 물결, 산에서 만난 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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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가지 색깔 보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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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보령 오서산은 서해안에서 몇 안되는 억새 명산이다. 지금 오서산에 오르면 하얗게 출렁이는 억새의 장관을 볼 수 있다.

가을이라구 보령서 뭐 볼게 있간디유. 있다구 헤봤자 별것두 아니구. 승주산(성주산) 말랭이(마루) 너머나 가야 단풍 쬐끔 들었을라나?
저짝 오스산(오서산) 억새꽃 나부랭이라먼 쬐끔 볼만 헐라나. 요새 억새꽃은 좀 폈겄네유.”

안학수(64) 시인이 나무라듯이 말했다. ‘여름에 안 오고 왜 가을에 왔느냐’는 투였다. 그래도 얼굴에서 싱거운 웃음기가 읽혔다.

“원래 충청도 사람이 대놓구 자랑 뭇 허잖어유. 보령 사람덜두 마찬가지유.”

이제야 의미가 와 닿았다. 요샛말로 ‘디스’가 아니라 은근슬쩍 보령 자랑을 늘어놨다는 것을. 50년 넘게 충남 보령에서 살고 있는 안 시인은 소설가 이문구(1941~2003)의 제자다. 보령 출신 이문구는 충청도 특유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작가로 통한다.

우선 보령이라는 지명을 좀 짚고 넘어가야겠다.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대천이 사람들 귀에 더 익고 입에도 더 달라붙을 터다. 하지만 1995년 보령군과 대천시가 합쳐지면서 두 고을은 인구 10만여 명의 보령시가 됐다. 지금은 보령군과 대천시 모두 사라진 지명이다. 사실 대천(大川)이라는 이름도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졌다. 원래는 큰 강이라는 뜻의 우리말 ‘한내’였다. 시내에서 한내라는 이름이 들어간 간판을 제법 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들 보령은 여름 피서지로만 안다. 서해안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대천해수욕장과 해외에서도 인정한다는 보령머드축제 때문이다. 하지만 보령은 바다보다 산야가 더 많은 고장이다. 들판이 황금 물결을 이루는 농촌이고, 산 중턱에 억새꽃 흔들리고 계곡에 단풍 흥건한 산촌이다. 보령시 면적 569㎢ 중에서 여름에 흥겨운 해안지역은 전체의 약 10%에 불과하다.

보령의 가을은 여름 못지않게 시끌벅적했다. 우선 황금 물결이 시선을 빼앗았다. 한내천, 지금은 대천천으로 불리는 강에 제방이 세워지면서 개펄 대신 들어선 논이 황금색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이문구가 소설 『관촌수필』에서 ‘봄부터 가을까지 동네 조무래기들과 벌거숭이로 뒹굴며 개랑물에 미역감고 게나 뿔고둥 따위를 잡고 놀았던 개펄’이라고 적었던 그 자리다.

노랑 물결은 시내를 벗어나도 이어졌다. 동네방네 심어놓은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고 있었다. 시내에서 30분쯤 북쪽으로 달려 도착한 청라면 장현1리는 마을이 온통 노란 은행나무로 뒤덮여 있었다. 3000그루가 넘는 은행나무가 있어 아예 은행마을이라고 불린다고 했다. 마을의 상징인 500년 묵은 수컷 은행나무는 온갖 풍상을 겪었으면서도 의연하고 여유있고 묵중한 자세로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김문한(51) 이장이 예의 시큰둥한 충청도 말투로 마을 자랑을 늘어놨다.

“금년처름 사람을 들볶구 쪄댄 여름두 읍었을규. 그래두 지난달은 비가 많어서 은행 잎싸구 색깔이 많이 누래졌슈.”

이번에는 하얀색이다. 은행마을 뒤쪽 오서산(791m) 자락은 흰색 천지였다. 능선을 따라 하얗게 핀 억새 때문이다. 오서산은 서해안에서 몇 안 되는 억새 명산이다. 오서산 억새는 널따란 군락을 이루지 않고 바다를 바라보고 가지런히 흔들리고 있었다. 산에 흰 띠를 두른 듯했다.

보령의 가을에도 빨강은 있었다. 성주산(680m) 단풍 얘기다. 성주산은 보령시내를 감싸고 있는 명산이다. 보령에서 “단풍 구경가자”고 하면 으레 “성주산 가자”라는 뜻이란다. 단풍 계곡으로 이름난 성주산 화장골에서 보령 사람 김현조(61)씨를 만났다.

“승주산(성주산) 단풍이 내장산이나 설악산처름 유명허진 않쥬. 그래두 옛날부텀 자식새끼덜 데꾸 단풍구경 다닌 디가 바루 승주산여유.”

보령의 가을도 이내 완연할 참이다. 보령의 가을을 환히 밝히는 노랑·하양·빨강 삼색의 향연도 다음주면 절정에 이를 것이다. 안학수 시인이 인사 삼아 말했다. “가을이 다 삭기 전에 얼른 다니러 오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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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석희 기자 seri1997@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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