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랬던 스페인, 일자리 100만 개 늘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2면

노동개혁 현장을 가다 <상>

기사 이미지

2012년 3월 29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시위에서 근로자들이 스페인 정부의 노동개혁 추진에 항의하며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중앙포토]

이달 중순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만난 택시운전사 훌리오 로페즈(47)는 요즘 “희망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몇 년 전만 해도 먹고 살기 힘들었다. 유럽연합(EU) 국가라는 게 부끄러웠다”라고 했다.

금융위기 여파 3년 전 실업률 26%
그리스 등과 ‘유럽의 돼지’비아냥
2012년 총파업에도 전격 노동개혁
3분기 연속 매출 준 기업 해고 허용
대신 비정규직에도 해고수당 지급
실업자 32% 줄고 GDP 3.2% 상승
자동차 산업 외국인 투자 5배 뛰어

1990년대 중반부터 2006년까지 10여 년간 스페인 경제는 좋았다. 운명은 2007년 하반기에 바뀌었다. 전세계를 휩쓴 글로벌 금융위기에 스페인은 맥없이 쓰러졌다.

2012년 6월 9일 마리아노 라호이 총리는 기자회견을 열고 구제금융 신청을 발표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 국) 4위의 경제대국이 졸지에 ‘PIGS’로 전락했다. 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와 한 묶음으로 ‘돼지’라는 비아냥을 듣는 처지가 됐다. 2008년 2분기부터 2014년 1분기까지 스페인에선 평균 18%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2013년엔 26.1%라는 사상 최악의 실업률을 기록하며 그리스와 함께 EU에서 가장 많은 실업자를 양산했다. 그런데 2012년 4분기 -2.5%를 기록했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전년 동기 대비)은 올해 2분기엔 3.2%로 높아졌다. 실업자 수도 32% 줄었다. 2014년 1분기부터 2016년 1분기까지 창출된 일자리는 유로존에서 독일에 이어 2위다.

기사 이미지

로페즈는 “지금은 일자리가 없어도 큰 걱정을 하지 않는다. 금방 다시 생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 교민 김선영(44)씨도 “경제가 어려울 땐 외국의 장관이 방문해도 커피 한 잔 내놓는 법이 없었던 국가의 경제가 좋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부도 위기에 몰렸던 국가가 이렇게 빨리 회복한 동력은 뭘까. 스페인 고용사회부 로잘리 세라노 벨라스코 고용정책실장은 “스페인 경제가 살아난 건 노동개혁 덕분”이라고 말했다.

스페인은 2012년 2월 노동개혁을 단행됐다. 2010년부터 노사정이 머리를 맞대고 협의했지만 합의가 어려웠다. 수당 정부는 마냥 시간만 끌다가는 국가가 나락으로 빠질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밀어붙였다. 노조가 총파업을 두 차례 했지만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유럽 내에서도 가장 강성으로 통하는 스페인 노조는 버티지 못했다. 사측과 협상에 나섰다. 노조가 선택한 건 최대한 고용을 유지하고 해고 규모를 줄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노동개혁이 시행됐다.

기사 이미지

스페인 노동개혁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해고 규정이 명확해지고, 정규직의 과보호를 완화하는 조치다. 기업이 3분기 연속 매출이 감소하면 해고가 가능하도록 했다. 정리해고할 경우 정부로부터 사전에 승인을 받도록 한 규제도 없앴다. 해고할 때 주는 수당도 줄였다. 근무연한에 따라 1년 근무 시 45일분, 최대 48개월치를 주던 것을 1년에 33일분(최대 24개월)으로 확 낮췄다. 대신 비정규직에도 해고수당을 주도록 했다. 1년 근무 때마다 12일분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를 줄였다. 여기에 노사 교섭 방식도 확 바꿨다. 중앙단위에서 산업별로 교섭해서 모든 기업에 적용하던 것을 기업별 교섭이 가능하게 바꿨다. 근로시간과 임금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도록 자율권을 대폭 확대했다. 기업이 인턴을 채용하면 교육비용을 정부가 댔다. 고용보험과 같은 사회보장비도 감면했다. 특히 해고 대신 근로시간을 줄이면 줄어든 근로시간을 반실업으로 인정해 실업급여를 지급했다. 예컨대 8시간 근무하던 직원을 해고하지 않고 근무시간을 4시간으로 줄이면 직원은 4시간분의 임금을 기업에서 받고 나머지 4시간분은 실업급여로 보충받는 식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오히려 정리해고가 줄었다. 2014년 8만2876명에 달하던 정리해고가 2015년에는 2만4572명으로 70.4%나 감소했다. 이 중 노조의 동의를 받은 해고가 88.6%다.

스페인 경영자총협회(CEOE) 아나 에레스 플라사 노사대책본부장은 “노동개혁 이후 노조도 경영상 어려움을 함께 공유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고 말했다.

그러자 스페인으로 투자가 몰려들었다. 2012년 10억 달러에 그쳤던 외국 자동차회사의 스페인 투자가 지난해엔 50억 달러를 훌쩍 넘었다. 독일 완성차 기업은 지난해 48억 유로를 스페인에 쏟아부었다. 자국 자동차 브랜드가 없는 스페인은 지난해 독일에 이어 유럽 내 자동차 생산량 2위에 올랐다. 이코노미스트연합회(FEDEA)는 최근 보고서에서 “노동개혁 이후 스페인에선 실업자가 32% 이상 줄었다”고 발표했다.

마드리드=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wolsu@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