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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포트리스(The Fortress) #12. 암시장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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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경단원들이 상인과 손님들을 몰고 밖으로 나갔던 뒷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원진은 반대편 복도로 뛰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치과가 있는 4층을 지나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있는 3층을 내려갈 때까지만 해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2층 계단으로 내려가는 순간 아래쪽에서 여러 개의 군화발소리가 들렸다.

“5층부터 뒤져.”

생각보다 가까이 들리는 지휘관의 목소리에 원진은 재빨리 레스토랑 출구를 밀었다. 하지만 단단히 잠겨 있었기에 곧바로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 거의 뛰듯이 계단을 오르면서도 인기척을 내지 않아야 했기에 가쁜 숨도 제대로 뱉을 수가 없었다.
원진은 4층에 도착하자마자 치과 문을 잡아서 흔들어 봤지만 예상대로 잠겨 있었다. 아래로 내려갈 수도 없었고 5층은 계엄군이 본격적으로 수색을 할 것이기 때문에 숨어도 소용이 없었다.

두꺼운 통유리로 되어 있는 치과의 출입문을 자세히 살폈다. 아래층 레스토랑과는 달리 잠금장치가 아래쪽에만 되어 있었다. 원진은 계단 아래쪽 인기척을 살피며 칼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칼날을 잠금장치 아래쪽에 꽂아 넣었다.
문손잡이를 최대한 들어 올리며 바닥 구멍에 걸려 있는 걸쇠의 틈에 칼을 비집어 넣었다. 칼날을 비틀어 바닥 인조석을 깎아내고 칼끝을 비스듬하게 만들어 걸쇠가 그 위로 올라타게 만들었다.

“5층에 1분대, 나머지는 11층으로 곧장 올라가서 몰고 내려와.”

여러 명의 병력이 움직이는 어수선한 소음과 함께 지휘관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얘기하듯 가까이 들렸다. 원진은 이를 악물고 어깨로 문을 밀었다. 칼날 옆면을 타고 올라갔던 걸쇠가 맨바닥에 닿자, 이번엔 칼이 문틈에 끼며 멈췄다.
병력은 3층을 지나 4층으로 올라오고 있었고 조금만 더 올라오면 원진의 모습이 보일 지경이었다. 원진은 신음소리를 내며 밀어붙였고 칼날이 부러지며 문이 열렸다.
원진이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문을 닫고는 유리문 옆벽에 몸을 숨겼다.

“정지.”

밖에서 지휘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명령에 계단을 오르는 어수선한 소리가 일시에 멈추고 긴장감이 감돌았다. 칼날이 부러지는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원진은 문틈으로 계단 쪽을 바라보았다. 지휘관은 부하를 향해 말없이 손짓을 해보였고 부하 한 명이 총을 앞세워 치과 출입문으로 다가섰다. 원진은 반사적으로 걸쇠를 바라보았고 힘으로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반쯤 풀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병사가 문에 손을 대고 앞으로 밀려고 할 때, 원진은 재빨리 부러진 칼을 걸쇠를 받치며 구멍에 꽂아 넣었다. 병사가 문을 밀자 걸쇠가 칼에 걸려 덜컹거리며 열리지 않았다. 힘을 줘서 민다면 열릴 상황이었다.

하지만 병사는 몇 번 앞뒤로 흔들어보고는 손 그늘을 만들고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원진은 재빨리 벽에 몸을 붙였다.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긴장한 듯 한 거친 숨을 내쉬며 병사는 안쪽을, 원진은 병사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눈에 불을 켜고 안쪽을 둘러보던 병사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문에서 떨어져 지휘관에게 말했다.

“이상 없습니다.”

“오케이. 가자.”
다시 병력은 계단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고 원진은 그들이 지나갈 때까지 걸쇠를 칼로 받치고는 가만히 있었다. 마지막 병력이 계단 위로 사라지고 나서야 짧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잠시 앉아있었다.
짧은 휴식을 취한 원진은 그제야 실내를 살펴보았다. 두꺼운 커튼으로 창문이 가려져 실내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전형적인 치과 모습 그대로였다. 출입문 바로 앞에는 병원업무를 보는 데스크가 있었고 그 양 옆으로 짧은 복도와 함께 진료실 등이 나열해 있었다.
원진은 곧바로 문이 달린 곳은 모조리 열기 시작했다. 이런 높이의 신식 빌딩이라면 어딘 가에 완강기(緩降機)가 분명히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원진이 원장실과 진료실을 확인하고 탕비실 문을 여는 순간 비상구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들어섰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일순간 얼음처럼 굳었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납게 엉겨 붙었다. 두 사람이 내는 소음이라고는 힘을 쓰며 내는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원진은 상대가 내지른 주먹을 슬쩍 흘려보내고는 명치에 주먹을 내질러 소리를 못 내게 하고는 뻗친 상대의 팔을 잡아 관절을 부러뜨렸다. 그는 고함을 지르듯 입을 크게 벌렸지만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원진은 그의 턱을 잡고 목을 비틀었다. 목에서 들리는 우두둑거리는 소리를 끝으로 그의 팔다리가 늘어졌다. 원진은 그제야 한숨 돌리며 놈의 상태를 살폈다. 옷을 입은 모양새가 자경단이었다. 계엄군에게 밀려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이곳으로 쫓겨들어 온 모양이었다.

비상구 바로 맞은편에 있는 또 다른 진료실 안으로 시체를 대충 밀어 넣은 원진은 탕비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구석을 보자 격자 모양의 완강기 지지대가 눈에 띄었다.
그는 지지대의 상태를 살피며 온통 치과 로고로 뒤덮인 창문을 통해 밖을 살폈다. 옆 빌딩과 틈이 좁았기에 잘하면 계엄군의 눈에 띄지 않고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원진은 지지대 바로 옆 벽면에 붙어있는 완강기 장비 케이스를 열었다. 다행히도 필요한 장비가 모두 들어있었다.
완강기를 꺼내 지지대에 걸려는 순간 탕비실 문 밖으로 무전기의 노이즈 소리와 더불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어. 이거 타고 내려가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던 놈은 원진과 눈이 마주친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원진은 반사적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완강기를 휘둘러 놈의 총부터 쳐냈다. 놈은 총을 떨어뜨렸지만 곧바로 주먹을 날렸다. 원진은 놈의 주먹을 피하며 그의 뒤로 돌아가 완강기에 달려 있는 줄을 놈의 목에 감아 조이기 시작했지만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놈은 노련한 동작으로 자세를 낮췄고 유도 기술로 뒤에서 목을 조르고 있는 원진을 앞으로 업어 쳤다.

“이 개노무 새끼가!”

벌떡 일어선 놈의 목에는 여전히 줄이 감겨 넥타이마냥 대롱거리고 있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원진에게 달려들었다. 놈이 손을 교차해 원진의 멱살 잡고 비틀자 숨이 턱 막혀왔다. 놈의 완력조차 원진보다 한 수 위였다. 놈은 원진을 들고 완강기 지지대가 있는 곳으로 밀어붙였다.

원진은 그의 새끼손가락을 부러뜨려 풀어내려고 했지만 놈의 굵은 손가락은 자물쇠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놈은 원진의 머리를 지지대 옆 창문에 거세게 부딪혔다. 창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고 그 충격으로 원진의 정신이 아주 살짝 혼미해졌다. 그 와중에도 이렇게 요란하게 구는 놈이 원망스러웠다. 이렇게 시끄럽게 굴었다간 밖에 있는 계엄군의 눈에 띄어 모두 죽을 게 분명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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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진은 되는대로 팔을 뻗어 창틀에 붙어있는 깨진 유리조각을 집어 놈의 목을 향해 찔렀지만 놈은 굵은 어깨를 위로 들어 올려 막았다. 유리조각은 놈의 두터운 어깨근육에 막혀 힘없이 부러졌고, 더욱 악이 받친 놈의 팔뚝 힘은 더욱 강하게 원진의 목을 조였다. 원진은 시야에 자꾸만 하얀 노이즈가 끼는 것이 보였다. 뇌에 공급되는 산소가 부족하다는 의미였다.
원진은 허우적거리며 목의 목에 넥타이처럼 매달려 있는 완강기를 잡아 삼각형 모양의 지지대 가운데로 통과시키고는 그를 꼭 껴안고 발로 벽을 밀어 찼다.
원진의 목을 조르느라 상체로 무게 중심이 쏠려있던 놈의 몸이 원진과 함께 창밖으로 기울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놈이 상체를 들어 올리려 했지만 창밖으로 거의 쏟아져 나온 원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떨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 앉은 채 밖으로 자유낙하를 했다. 떨어져 내리는 두 사람 옆으로, 원진이 떨어뜨렸던 완강기가 빠른 속도로 위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팅!
완강기가 지지대에 부딪혀 걸리며 우뚝 멈췄고, 원진의 몸무게까지 고스란히 더해진 충격으로 놈의 목에 감겨 있는 줄이 교수형 밧줄처럼 옭아매며 놈의 목뼈를 부러뜨렸다.
교수형 당한 시체에 매미처럼 붙어있는 형국인 된 원진은, 얼마나 내려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아래를 내려 보았다.

“젠장.”

그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곳은 2층과 3층 사이였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틈이었기에 충격을 완화해 줄 그 무엇도 없었고, 그냥 뛰어내리기에는 여전히 높았다.

“여기!”

아래쪽에서 불길한 외침 소리가 들렸다. 원진은 확인할 것도 없이 시체를 잡고 3층 창문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고 거의 동시에 드르륵 거리는 총소리와 함께 총알 세례가 퍼부어졌다.
설상가상으로 두 사람의 무게를 견디고 있던 지지대 위쪽 나사가 부러졌다.
원진은 몸이 돌아가지 않도록 벽에 발을 대고 지지한 채 시체 뒤에 숨어 3층 유리창을 걷어찼다.

“3층이다! 3층!”

계엄군 병사는 동료들을 향해 원진의 일거수일투족을 중계했고 그럴수록 원진은 더욱 다급해졌다. 원진이 창틀에 손을 뻗는 순간 또 다시 나사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줄이 갑자기 느슨해졌고 머리 위쪽에서부터 뭔가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드는 소리가 들렸다.

원진은 줄을 놓으며 창틀에 매달렸다.
시체는 아래로 떨어져 내렸고 이어서 완강기와 뒤엉킨 지지대가 그의 등을 훑듯이 스치고 지나가며 떨어졌다.
원진이 턱걸이를 하듯 창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에도 총알이 수없이 날아들었다.
창문 안쪽으로 그가 굴러 떨어지자마자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보지도 않고 본능대로 몸을 굴려 피했고 그가 있던 자리에 쇠파이프가 내리꽂히는 게 보였다. 원진의 몸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쇠파이프 옆에 버티고 있는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는 방금 깨진 유리조각들을 한 움큼 집어 쓰러진 놈의 눈에 때리듯 박아 넣고 손바닥으로 비벼버렸다.

“아악!”

원진은 비명을 지르는 그의 아래턱을 걷어차 부러뜨려 순식간에 시체로 만들고는 동물처럼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그제야 그곳이 레스토랑 주방이고 자신 앞에 총을 든 사내가 서 있다는 것을 깨달은 원진은 얼음처럼 우뚝 멈췄다.

놈이었다.
5층에서 자신의 복부를 개머리판으로 때려 주저앉힌 바로 그 자경단원.
자경단원의 표정은 굳어있었지만 동요하는 빛은 없었다. 그가 무겁게 힘을 열었다.

“어쩐지 낯이 익다 했지.”

원진은 그가 살려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지만 그는 원진의 가슴으로 향해있던 총구 방향을 차분하게 머리 쪽으로 옮겼다. 그 순간 원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놈이 총을 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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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중앙대학교 졸업. IT 회사 입사, 경영기획, 전략기획, 사업제휴 등의 다양한 직무 경험.
1999년 포털사이트에 <왼팔> 연재. 2001년 출간. 이후 소시오패스를 전면에 내세운 액션 스릴러 <Business is business>(2010), <유령 리스트>(2015)로 액션물 출간.

2001.08 「왼팔」
2003.03 「왼팔II」
2005.07 「적경」
2008.06 「피해의 방정식」 (한국 스릴러문학단편선)
2010.01 「위험한 오해」 (한국 스릴러문학단편선II)
2010.10 「Business is business」
2013.11 「사이비」 (원작 : 연상호)
2014.03 「조난자들」 (원작 : 노영석)
2015.08 「유령 리스트」
2015.10 「살인의 기원」 2015 부산영화제 북투 필름 피칭작 선정
2016.04 「왼팔 rebuild」
2016.04 「블랙러시안」, 「증오」, 「복수의 미학」 (맨 헌터 태성 시리즈)
2016.05 「십이 죄」
2016.07 「세일즈 플래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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