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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부자병이라는 불치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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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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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

대통령 비선(秘線)의 국정 농단 의혹은 일반 국민의 눈높이에서 보자면 별로 새롭지 않다. 낯선 등장인물들이 얽히고설켜 복잡해 보이긴 해도 결국 큰 그림에서 보자면 정권 말기마다 반복되는 기시감 있는 사건일 뿐이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다르다. 야당으로부터 ‘권력 서열 1순위’ ‘금수저를 넘는 신(神)의 수저’라는 소리를 듣는 스무 살 여대생 정유라씨 때문이다.

청와대의 비선 실세로 지목된 최순실씨를 엄마로 둔 정씨는 이화여대 특혜 입학 시비를 시작으로 각종 의혹의 중심에 서며 국민적 관심을 ‘비선 퍼즐 맞히기’로 돌려놓는 공(?)을 세웠다. 몇 년 전 그가 출전한 승마대회를 둘러싼 잡음 후 문화체육관광부 국장 목이 날아갔느니 뭐니 할 때만 해도 그게 사실일지언정 ‘나와는 상관없는 권력형 비리’ 정도로 여겼다. 이런 분위기가 급반전해 ‘내 일’처럼 흥분하기 시작한 건 군대 비리만큼이나 휘발성 강한 소재인 입시 문제를 건드린 데다 그가 입학한 이화여대가 갖는 상징성이 한몫했다. 입학 과정이 석연치 않은 건 그렇다 치고 제적 경고를 하는 지도교수를 갈아치우며 출석도 안 한 수업의 학점을 따고, 편의를 봐준 교수는 수십억원의 연구비를 받았다는 믿기 어려운 의혹에 비선의 실체를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온 국민의 공분을 산 결정적 계기는 2014년 말 정씨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에 올렸다고 추정되는 글이 최근 공개되면서부터다.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돈도 실력이야’라는 바로 그 글 말이다. ‘돈도 실력’이라는 글을 읽자마자 올 초 미국을 떠들썩하게 한 ‘부자병’ 걸린 이선 카우치를 떠올렸다. 그는 열여섯 살이던 2013년 음주운전으로 4명을 숨지게 하고도 부자병을 핑계로 감옥 대신 10년의 보호관찰(금주 조건)이라는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 그런데도 술을 마시고 경찰에 쫓기다 멕시코로 도주해 버렸고, 미국은 부자병 논란으로 뜨거웠다. 2001년 PBS PD 등이 쓴 동명의 책(『어플루엔자』)에서 유래한 부자병은 너무 풍요롭고 귀하게 자라 옳고 그름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장애를 말한다. 실제 질병이라기보단 징역형을 피하려고 카우치가 짜낸 묘수에 가깝다. 하지만 돈이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배금주의를 넘어 남에게 피해를 주는 탈법에도 가책을 못 느끼는 일부 부유층 자제의 도덕불감증을 담기엔 그 자체로 더없이 좋은 표현이다.

만약 정씨가 부자병을 앓고 있다면 딱한 노릇이다. 치료제 없는 불치병이니 말이다.

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