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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익성 지표 바닥권인 한국 금융의 미래는] 잉카제국처럼 멸망할 것인가 누우(아프리카 들소)처럼 끈질기게 생존할 것인가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한국 금융이 위기다. 예전보다 덩치가 커지고 화려해진 듯 보이지만 정작 돈을 제대로 벌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수익성 지표인 총자산순이익률(ROA)과 자기자본이익률(ROE)은 어느 순간부터 하락 일로를 걷고 있다. 해외 유수의 선진 금융회사와의 격차는 좁혀질 줄 모르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은행·보험·증권·카드사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현상이다. 금융인들이 놀고 있는 게 아닌데도 수익 지체 현상은 좀처럼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금융권이 총체적 무기력증에 빠졌다는 우려도 나온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한국 금융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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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9000억원. 올 상반기 한국의 은행들이 벌어들인 순이익이다. 적지 않은 액수다. 하지만 이게 과연 국내 은행들의 덩치에 합당한 금액일까.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숫자를 하나 들여다보자. 0.17%. 올 상반기 국내 은행들의 평균 총자산순이익률(ROA)다. ROA는 총자산에서 순이익이 차지하는 비중이다. 풀어서 설명하면 한국의 은행들은 올 상반기에 100원의 자산을 이용해서 고작 0.17원을 벌었다는 얘기다. 10여년 전인 2005년 국내 은행의 ROA는 평균 1.27%였다. 도대체 그동안 국내 은행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외국 금융사에 ROA·ROE 크게 뒤져…
파괴적 혁신, 과감한 투자, 글로벌 진출 필수

한국 금융권이 총체적인 무기력증에 빠졌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외형적으로는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충분한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다. 수익의 질을 진단할 수 있는 대표적 지표인 ROA와 자기자본이익률(ROE)을 점검해보면 상황의 심각성을 쉽게 알 수 있다. ROE는 투입한 자기자본으로 얼마의 이익을 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100원 굴려 0.17원 벌어 … 5~10년 후 장담 못 해

금융업이 발전할수록 높아져야 할 두 지표는 반대로 계속 낮아지고 있다. 해외 선진 금융사들과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비단 은행에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보험·증권·카드사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은행 사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대로라면 한국 금융사들이 끓는 물 속의 개구리처럼 서서히 고사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금융사들이 현 상황에 안주하면 5~10년 후를 보장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금융권을 대표하는 은행부터 살펴보자. 은행의 수익성 지표들은 심각한 수준이다. 올 상반기 국내 은행들의 평균 ROA인 0.17%는 13년 전인 2003년과 똑같다. 2003년이 어떤 시기였나. 1997년 외환위기로 ‘대마불사’ 신화가 무너지면서 한국의 대표 은행들은 속속 쓰러져갔다. 제일은행과 외환은행은 외국 사모펀드에 팔려나갔고, 서울·조흥은행은 과거 그들이 경쟁 상대로도 여기지 않았던 신흥 강자들에게 인수됐다. 우리은행처럼 정부가 몇 개 은행을 묶은 후 국민 혈세로 조성한 공적자금을 투입해 간신히 명줄만 유지한 경우도 있었다. 수익성을 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의 ROA가 그 때와 똑같다는 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은행 수익성 지표 2003년 수준 뒷걸음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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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치고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당장 외환위기의 뒷수습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2004년에 은행 평균 ROA는 0.85%로 급상승했다. 2005년은 절정기였다. ROA가 1.27%로 치솟았다. 은행의 미래는 밝아보였다. 누구나 ‘메가뱅크’와 ‘대형 투자은행(IB)’의 탄생을 논했다. 덩치를 불린 은행들이 세계 시장으로 진출해 해외 선진 은행들을 따라잡으리라는 기대도 충만했다. 그러나 그 때뿐이었다. ROA는 2006년과 2007년 답보 기미를 보이더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도래와 함께 0.48%로 급감했다. 이후 소폭의 등락을 거듭하던 ROA는 2015년 0.16%로 떨어졌고, 올 상반기에도 반등하지 못했다. 오히려 2분기에는 마이너스(-0.08%)로 추락했다. 국내 은행권이 4000억원대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ROE도 마찬가지였다. 2005년 18.42%로 최고봉에 등극한 후 서서히 하락하더니 지난해 2.08%로 추락했다. 올 상반기에도 2.3%로 지난해와 비교할 때 도낀개낀이다. 2분기만 놓고 보면 ROA와 마찬가지로 마이너스(-1.07%) 신세다. 곧 따라잡을 것처럼 보였던 외국의 은행들은 그동안 더 멀리 도망갔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15년 현재 미국 상업은행의 평균 ROA는 1.04%, ROE는 9.26%다. 국내 은행들보다 ROA는 10배 가까이 높고, ROE도 4배 이상 높다. 물론 국내 은행 평균 지표들은 산업은행·수출입은행 등 태생적으로 적자를 면키 어려운 국책 특수은행들이 모두 갉아먹고 있다는 변명도 가능하다.

하지만 상위 시중은행들 역시 처지가 별반 다르지 않다. 지난 5월 하나금융경영연구소가 국제은행 통계사이트 뱅크스코프(Bankscope)의 자료를 분석해 정리한 2015년 기준 세계 100대 은행 보고서를 보자. 이 명단에 포함된 한국의 은행들은 KB금융·신한지주·하나금융·우리은행·농협·기업은행 등 6곳이다. 은행의 국적별 순위로 따져보면 미국(20개)·중국(10개)에 이어 캐나다와 함께 공동 3위에 해당한다. 수익성 지표를 비교해보면 사정이 크게 달라진다.

한국의 6개 은행 평균 ROA는 0.43%, ROE는 5.56%에 그쳤다. 이에 반해 세계 10대 은행의 ROA는 1.05%에 달했다. 글로벌 100대 은행으로 범위를 넓혀도 평균 ROA가 0.75%로 한국 은행들에 비해 크게 높았다. 세계 상위 10대 은행의 평균 ROE도 11.6%로 국내 6개 은행 평균의 2배 수준이다. 국내 은행 전체 평균 ROE와 비교하면 5배 수준에 가깝다. 보고서를 작성한 정희수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한국계 은행의 수익성 지표는 외국 동일 그룹 은행들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전 세계 곳곳에 진출해있는 씨티은행의 각국 지점 간 ROA 비교 결과도 민망하다. 씨티은행이 진출한 아시아 18개국의 ROA가 평균 1.4%인데, 한국 씨티은행의 ROA는 0.4%에 불과하다.

다른 업권도 별반 다르지 않다. 2010년 5.46%까지 올랐던 국내 카드사 ROA는 올 상반기 2.04%로 내려왔고, 카드사 ROE도 같은 기간 19.77%에서 7.83%로 추락했다. 해외 카드사 중 국내 카드사들과 비슷한 영업 구조를 갖고 있는 아메리칸익스프레스카드의 경우 지난해 ROA가 3.2%, ROE가 24.5%로 국내 업체들과 큰 격차를 보였다. 올해 상반기 보험사 ROA는 0.89%로 지난해 같은 기간(1.01%)보다 0.12%포인트 떨어졌다. ROE도 전년 동기(10.20%)보다 하락한 8.68%였다. 특히 생보사의 경우 ROA와 ROE가 각각 0.62%, 6.77%로 전년보다 0.21%포인트와 2.54%포인트 하락했다. 대 호황기였던 지난해 상반기에 0.98%로 치솟아 올랐던 국내 증권사 ROA도 올 상반기에는 0.64%로 고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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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금융시장 성숙도 138개국 중 87위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국 금융사들이 한국 경제에 기여하는 정도도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올해 국정감사를 앞두고 국회 입법 조사처의 조대형 입법조사관이 한국은행 산업연관표를 토대로 분석한 ‘금융산업의 경제기여도 현황 및 과제’를 보면 한국경제의 총산출액 대비 금융산업의 산출 비중은 2007년 4.7%에서 2014년 4.0%로 감소했다. 산출액이란 한 해 생산된 해당 산업의 재화 및 서비스의 가격을 합산한 금액이다. 국내 금융산업이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부가가치 금액 비중도 같은 기간 6.8%에서 5.6%로 낮아졌다. 부가가치 금액 비중이 작아지고 있다는 것은 금융업이 국내총생산(GDP)에 기여하는 부분이 감소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국제 비교에서도 한국 금융의 현실은 쉽게 확인된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이 올해 5월 발표한 국가경쟁력 순위를 보면 한국의 금융 부문은 전체 61개국 가운데 37위에 그쳤다. 작년보다도 6단계 하락한 순위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최근 세계 138개국의 국가경쟁력을 평가한 결과를 봐도 한국의 금융시장 성숙도는 87위에 불과했다.

돈을 벌지 못하니 고용 측면의 기여도 미미하다. 금융연구원이 내놓은 ‘2015년 금융인력 기초통계 분석 및 수급전황’에 따르면 지난해 총 1338개 금융회사에 고용된 인력은 28만5029명으로 집계됐다. 2년 전에만 해도 29만명 수준이었지만 은행과 보험사, 증권·선물사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지난해에만 보험업에서 1502개, 증권·선물업에서 1684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2014년과 2015년의 전체 산업 취업자수는 각각 2.1%와 1.1% 증가한 반면, 금융·보험업 취업자수는 각각 3.1%와 5.9% 감소했다. 2015년 전 산업의 일자리 창출 기여도는 1.05%였던 반면, 금융·보험업 기여도는 -0.19%였다. 전 년의 -0.11%에 이어 2년 연속 마이너스다.

더 큰 문제는 전망도 그리 밝지 않다는 사실이다. 은행의 경우 저금리 지속으로 예금과 대출 금리의 격차인 예대마진이 줄어들면서 위기에 봉착한 상태다. 그렇다고 수수료 등 비이자 부문에서 수익을 창출하기도 어렵다. 수수료 인상에 대한 금융소비자의 반감이 큰데다 자체 경쟁도 워낙 치열하기 때문이다. 하영구 은행연합회장은 10월 8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전체 수익에서 수수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미국과 일본은 30~40%인데 반해 한국은 10%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탄했다.

새 회계기준 적용 땐 보험업 뿌리 흔들

보험 업계는 더 큰 암초를 만나게 된다. 2020년부터 적용 예정인 새 회계기준(IFRS 2단계) 때문에 업계의 뿌리가 흔들릴 지경이다. 새 회계기준은 자산과 부채를 원가가 아닌 시가로 평가한다. 이렇게 되면 부채가 지금보다 크게 늘어나게 돼 보험사들은 막대한 자본을 확충해야 한다. 보험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총 44조원의 자본 확충이 필요한 상태다. 증권업도 증시 등락에 따라 수익이 좌우되는 천수답식 경영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주가연계증권(ELS) 같은 히트 상품이 나오면 너도 나도 ELS 발행에 몰두하는 식의 쏠림 현상도 여전하다. 카드 업계 역시 간편결제 등 모바일 결제시스템의 급성장과 가맹점 수수료율 인하, 저금리로 인한 현금서비스 수익 감소 등으로 고전 중이다. 카드사마다 새로운 활로 모색에 주력하고 있지만 새로운 사업 아이템 발굴은 쉽지 않은 일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국 금융업 존망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한동우 신한금융그룹 회장은 올 초 강연에서 금융업의 위기 상황을 잉카제국의 멸망에 빗댔다. 그는 “고작 168명의 스페인 군에 의해 8만 명의 군대와 1000만 명이 넘는 인구를 거느린 거대한 잉카제국이 멸망했다”며 “스페인군과 함께 상륙한 천연두와 흑사병 등 새로운 질병, 양 세력 간 무기의 차이, 외부와의 교류가 없었던 잉카제국의 폐쇄성 등이 멸망의 원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처럼 신속한 변화에 대한 대응이나 글로벌한 시각이 없다면 핀테크 등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직면한 금융업의 미래 역시 안전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혁신이 답이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지난해 취임사에서 “우리 금융이 현재의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획기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며 “변화는 어렵지만 변화하지 않는 것은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임 위원장이 내놓은 구체적 개혁 실천방안은 자율과 경쟁의 확대, 자본시장의 활성화, 핀테크와 해외 진출 등 새로운 성장동력 발굴, 금융시장 안정성 제고였다.

금융권 판도 뒤흔들 인터넷 전문은행

민간의 시각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윤만호 EY한영회계법인 부회장도 최근 열린 한 포럼에서 ‘파괴적 혁신’을 제안했다. 윤 부회장은 “미래 금융산업은 고도성장 환경에서 저성장으로, 또 정부 주도에서 고객 주도로, 외형 위주에서 혁신 위주로, 제로섬(한 쪽이 득을 보면 다른 쪽이 손해를 보는 상태)에서 포지티브 섬(협력을 통한 상생전략)으로 완전히 바뀌어나갈 것”이라며 “현재 금융업이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금융업의 활로 모색을 위해서는 재무구조 혁신, 사업포트폴리오 재편, 혁신 신상품 개발, 글로벌화 추진, 디지털 혁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한국 금융인들에게는 혁신의 경험이 많지 않다. 한 대형 시중은행 고위 인사는 최근 사석에서 “금융위원회가 올 초 은행의 일임형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운용을 허용했을 때 은행권은 수류탄을 하나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충격을 받았다”며 “은행은 태생적으로 경쟁을 싫어하고, 투자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에 권한을 손에 쥐어줘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변화의 조짐은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고인 물이었던 금융권에는 오랜만에 기존 ‘미꾸라지’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 ‘메기’가 등장할 판이다. 인터넷전문은행인 카카오뱅크와 K뱅크의 등장은 기존 금융권의 판도를 뒤흔들 중요 변수다. 지분 매각 작업의 첫 단추를 잘 꿴 ‘민영 우리은행’의 탄생 역시 기존 플레이어들에게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다. 통합 미래에셋증권의 등장은 은행 일임형 ISA의 등장과 함께 한국 금융의 중심축을 은행에서 대형 IB로 옮아가게 만들 중요한 시금석이 될 수 있다. 미래에셋대우(옛 대우증권)와 미래에셋증권의 결합으로 11월 탄생하는 통합 미래에셋증권은 자산 규모 8조원의, 압도적인 증권 업계 1위 기업으로 우뚝서게 된다. 이미 증권 업계는 KB투자증권과 현대증권의 결합 등 업체 대형화의 움직임이 속속 포착되고 있다.

보험 업계와 카드 업계도 신상품을 속속 내놓는 등 나름대로의 활로 모색에 분주한 상황이다. 임종룡 위원장은 “변화와 위기를 예측하고 적극적으로 미래 금융에 대비한다면 한국 금융도 새로운 성장 기회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모두가 아프리카 들소인 누우가 되어야 한다는 게 임 위원장이 내놓은 성공의 전제 조건이다. 누우는 사자와 악어의 습격으로 큰 희생을 치르면서도 건기가 되면 어김없이 새로운 초원을 찾아 수백㎞ 이상의 대이동을 감행한다. 한국 금융권이 누우처럼 꾸준히 전진해 마침내 금융개혁을 이뤄낼지, 아니면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외부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잉카제국처럼 주저앉고 말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박진석 기자 kaila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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