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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로 권하는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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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전수진 기자 중앙일보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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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진
정치부 기자

올해 4세인 우진(가명)이는 아빠가 출장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아빠의 선한 눈매를 꼭 닮은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하고서다. 하지만 아빠는 이제 세상에 없다. 지난달 24일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진 뒤 끝내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41세. 죽음과는 너무 먼 나이였다.

정부 출연 연구기관에 근무했던 고(故) 정모씨 얘기다. 뇌출혈로 의식을 잃은 그는 지난 17일 끝내 숨졌다. 부인 등 유족은 과로사라는 입장이다. 부서 이동 뒤 업무량이 많아져 과로가 일상이 됐다고 한다. 피곤에 지쳐 하루 쉬려고 했지만 결국 출근했던 다음날 집에서 쓰러졌다.

19일 장례를 치른 부인은 통화에서 “몇 주 전부터 편두통이 심하다고 호소했는데 갑자기 의식을 잃었다”고 했다.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보냈는데…”라는 목소리에서 황망함이 묻어났다. 정씨의 동료는 “말이 없고 지극히 성실했던 친구이자 젊고 유망한 학자였다”며 “아빠를 기다리는 아들이 안타깝더라”며 침통해했다.

남의 얘기만은 아니다. 과로사는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지난 8월 발표에 따르면 한국인 취업자 1인당 평균 근로시간은 연 2113시간으로 OECD 회원국 중 2위다. 최저 근로시간을 기록한 독일인(1371시간)보다 약 800시간이 많다. 법정 근로시간 8시간으로 따지면 1년에 100일을 더 일하는 셈이다. 과로사 위험 역시 높을 수밖에. 무리해서 일하는 것을 성실하다고 평가하며 되레 권장하는 듯한 사회 분위기도 한몫할 터다.

과로사의 대표 격으로 꼽히는 일본조차 연간 근로시간은 1719시간으로 한국보다 적다. 과로사(過勞死)라는 말 자체가 일본어에서 왔다. 일본어 발음 ‘가로시’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karoshi’로 등재되기도 했다. 그래도 일본은 적어도 과로사를 줄이기 위한 적극 행보는 시작했다. 2014년 과로사 방지대책추진법을 만들었고, 이달 초엔 정부가 기업 1만여 곳을 조사해 ‘과로사 백서’도 냈다. 한국은 어떤가. 과로사 관련 명확한 기준도 없고 업무상 재해 인정을 위한 판결도 제각각이다. 과로사 인정을 받으려는 정씨 유가족의 마음이 더욱 무거운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전직 외교통상부 장관의 회고록을 두고 진실게임 공방에 매몰된 정치권도 ‘노답’이다. 우진이와 같은 안타까운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정치권이 머리를 맞대는 건 대한민국에선 무리일까. 노력 정도만이라도 해주면 좋겠다. 과로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전수진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