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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용과 돼지의 다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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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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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 논설위원

동심으로 돌아가니 모든 게 새롭다. 지난 18일 서울 국립민속박물관 부속 어린이박물관, ‘신화 속 동물 이야기’ 상설전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전시장 초입은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가 장식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박혁거세는 말(馬)이 하늘에서 가져다준 알에서 태어났다. 경주 천마총이 생각난다. 박물관 측은 아이디어를 짜냈다. 알 모양 의자를 준비하고, 말이 비행기·독수리 등을 피하며 하늘로 올라가는 비디오 게임도 만들었다.

신화 속 동물에서 용이 빠질 수 없다. 박물관 벽면 한쪽에 용 형상을 붙여놓았다. 용 부위 부위에 작은 패널을 만들어 그것을 열어보게 했다. 중국 의학서 『본초강목』에 나오는 용 모양에서 힌트를 얻었다. 옛 사람들은 용의 눈은 토끼를, 발톱은 매를, 배는 원숭이를, 머리는 낙타를, 뿔은 사슴을 닮은 것으로 상상했다. 천진기 민속박물관 관장은 “동양의 용은 여러 동물의 장점을 모아놓은 상서로운 존재”라고 설명했다.

눈에 띄는 대목은 용의 코가 돼지 코와 비슷하다는 점. 용은 돼지를 못마땅해했다. 온몸이 쭉 빠진 용모에 못난이 돼지 코라니…. 예부터 민간에서도 용띠와 돼지띠는 궁합이 맞지 않는 것으로 봤다. ‘개와 원숭이 사이’쯤 됐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벌어지는 요즘 여야 간 싸움이 용과 돼지의 다툼과 뭐가 다를까. 최순실 게이트, 송민순 회고록 등 자기 허물은 감추고 상대방 흠집만 물어대는 구태, 분명 용이 되려는 자들의 도량이 아니다.

옛사람들은 통이 컸다. 시쳇말로 ‘구라’가 셌다. 이번에 고려 왕조가 체제 정통성을 확립하려고 꾸며낸 작제건 설화도 알게 됐다. 왕건의 할아버지라는 작제건은 서해 용왕을 괴롭히는 여우를 퇴치하고, 그 보답으로 용녀(龍女)를 배필로 얻었다고 한다. 여우는 신라 말기 부패한 귀족 세력쯤 되겠다. 거짓말을 해도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신화가 사라진 시대라지만 민초의 상상력을 북돋고, 민생의 아픔을 헤아리는 위정자가 여전히 그립다.

아이들 놀라고 만든 자리에 구질구질 정치를 또 꺼내 들어 겸연쩍다. 그리스·로마 서양신화에 경도된 요즘 어린이들에게 우리의 얘기를 알려주자고 마련된 전시다. 역시 중심은 단군신화다. 곰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마늘과 쑥을 받아먹으면 인간으로 변하는 게임도 있다. 피자나 사탕을 먹으면 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은근히 중독성이 있다. 유치원 꼬마들의 까르르 웃음소리도 들려온다. 아이들의 환한 얼굴을 지켜주는 것, 그게 이 시대의 신화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