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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경제부총리 말은 천금같아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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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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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논설위원

유일호 경제부총리는 기자들에게 ‘양치기 부총리’로 불린다.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당장 엊그제 부동산 대책도 그랬다. 유 부총리는 17일 “그런 것(투기과열지구 지정)을 포함해 강남 부동산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쯤 되면 부총리 말을 받아 일단 기사를 쓰고 보는 게 순서다. 하지만 많은 기자들이 사실 확인부터 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기획재정부는 곧바로 해명자료를 냈다. “구체적인 사항은 정해진 바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중요 현안마다 말 바꾸기
시장 혼선, 정책 실패 자초

그 나흘 전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유 부총리는 국정감사에서 “총부채상환비율(DTI) 조정 등 추가 대책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기재부는 바로 해명자료를 냈다. “DTI에 대해서는 현 시점에서 전혀 검토하고 있지 않음을 알려드립니다.”

이러니 기자들이 실무 차관보나 국장에게 부총리 말의 진위부터 확인할밖에. 하기야 어디 어제오늘 일인가. 열흘 전엔 워싱턴에서 재정과 금리 문제로 한국은행 총재와 이견을 빚은 게 불협화음으로 비치자 유 부총리는 “하지도 않은 말이 잘못 전달됐다”며 발을 뺐다. 총선 전후 ‘한국형 양적완화’를 반대했다가 슬그머니 찬성으로 돌아서기도 했다. 취임 초엔 “추경은 절대 안 한다”고 했다가 두 달도 안 돼 “할 수도 있다”로 말을 바꿔 빈축을 샀다.

물론 나름 이유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 사령탑인 경제부총리의 말이 가벼워선 안 된다. 부총리의 말이 바뀌면 정책은 산으로 가고 시장은 혼란에 빠진다. 게다가 유 부총리가 뒤집은 말들 대부분은 주요 경제 현안이자 시장엔 핵폭탄급 관심 사항이었다. 한 번만 삐끗해도 대형사고요, 거듭되면 정부를 믿지 않게 된다. 그 뒤엔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실패한다. 백약이 무효다. 당장 초미의 관심인 부동산 대책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부총리가 ‘투기과열지구 지정’을 말한 다음날 강남 재건축 거래는 주춤했다. 몇천만원씩 값을 낮춘 급매물도 나왔다. 부총리가 ‘잘못 언급한 말’에도 시장은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시장도 한 번 속지 두 번 속지는 않을 것이다. 벌써 일각에선 “내년 대선 때까지 정부가 절대 부동산을 손대지 못한다”며 “강남 집값이 20~30%는 더 오를 것”이라고 되레 과열을 부추긴다지 않는가.

정부의 속내는 ‘부동산 불씨는 살리되 강남 나 홀로 급등만 잡자’다. 하지만 그런 묘수는 현실엔 없다. 정부가 가진 수단은 크게 두 가지다. 국토교통부의 수급 조절과 금융위원회의 돈줄 죄기다. 이론적으론 강남 대체재를 무제한 공급하거나 주택담보대출비율(LTV)과 DTI 규제를 대폭 강화하면 과열은 바로 잡힌다. 하지만 현실에선 불가능하다. 그 중간에 청약·분양 제도 손질이나 중도금 대출 규제 같은 미세 조정 수단들이 꽤 있다. 이걸 적절히 조합해 시장을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가는 게 숙수(熟手)다. 그러려면 경제팀이 일사불란해야 한다. 다른 소리가 나오는 순간 꽝이다.

국토부는 투기과열지구 지정이란 극약 처방은 웬만하면 안 쓰자는 쪽이다. 쓴다고 강남 부동산값이 잡힐지도 의문인 데다 강남이 꺼지면 전국 부동산이 다 가라앉을까 겁나서다. 금융위 역시 LTV나 DTI는 손대지 않으려 한다. 가계부채는 DTI 규제를 완화한 2년 새 1000조원에서 1257조원으로 약 250조원이 늘었다. 이걸 다시 조였다간 그만큼의 빚을 가계가 당장 갚아야 한다. 집값 급락, 경제 파탄의 충격이 올 수 있다. 대선이 코앞이다. 금융위로선 감당 못할 일이다.

그런데도 유 부총리는 부처 간 조율은커녕 우왕좌왕 말 바꾸기로 혼란만 부추겼다. 그러니 구조조정은 대량 실업 무섭다고 안 하고, 경제 살리기는 국회 탓만 하며 못하고, 강남 집값은 대선 때문에 놔둔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 아닌가. 차라리 부총리의 말 바꾸기가 단순 실수였기를 정말 간절히 바란다. 행여 경제 운용 철학도 없고 부처 간 조율도 안 되는 데다 이 눈치 저 눈치 보다가 다른 얘기가 나온 것이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래서는 비틀대는 나라 경제가, 걱정하는 국민이 너무 불쌍하지 않겠나.

이정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