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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포트리스(The Fortress) #11. 규칙 (3)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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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진은 암시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전기 울타리를 고치느라 내려놓았던 스위치를 올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옆자리에 보원만 없다면 즉시 되돌아가서 스위치 올리고 왔을 테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보원에게 빈틈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고, 만약 그 사실을 보원이 알게 된다면, 원진도 모르는 놈들에게 몰래 연락해 어떤 작당을 꾸밀 수도 있으니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보원의 질문에 원진은 그를 돌아보았다.

“내가요?”

“원진 씨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면 그런 표정이 되더라고요.”

원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무것도.”

보원은 딱히 믿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다 앞쪽에 있는 빌딩을 가리켰다.

“저기에요.”

암시장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더불어 동네에 이런 빌딩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약간은 신선했다.
꼭대기에 <The Fox>라는 빨간색 옥외 간판을 가진 빌딩은, 외관상 덩치가 작아서 그렇지 눈으로 세어보니 11층이나 되는 건물이었다. 1층부터 4층까지는 각각 편의점, 카페, 레스토랑, 치과 간판이 붙어있었지만 그 위로는 창문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보원이 빌딩을 올려보며 말했다.

“빌딩 전체가 비즈니스 클럽이었어요. 광화문에서 근무할 때는 가끔 왔던 곳이죠.”

말이 좋아 ‘비즈니스 클럽’이지 거대한 유흥주점이란 뜻이었다. 술과 여자로 접대하고 그 대가로 사업적인 이익을 얻는 그런 곳.

“그런데 경기 안 좋아지면서 일곱 개 층으로 줄었지만 그래도 거의 마지막까지 버티던 곳이었는데 결국 이렇게 됐죠.”

원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다른 시장도 이런 식으로 열려요?”

보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켓 열기엔 가장 좋죠. 룸을 매장 삼아서 장사하면 여러 가지로 편하니까.”

“건물주는 얼마나 먹어요?”

“깔세에요. 층당 얼마씩 해서 일회성으로 선금 받는 거죠.”

빌딩 입구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가 막아서며 원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보원이 앞으로 나서서 종이를 들어 보이자 그는 종이를 회수하고 보원과 원진의 팔에 종이 밴드를 감아 주었다. 안으로 들어서며 보원이 말했다.

“자경단이에요. 시위대나 계엄군이나 하는 짓은 똑같이 강도짓이라 업주들이 고용한 거죠.”

“자경단으로 막을 수 있어요?”

“도망칠 시간만 벌어주는 거죠.”

시민군이 없는 계엄령 초창기 때는, 계엄군은 암시장 단속에 전력을 다했었다. 암시장이야말로 그들이 보호하는 물주들의 적이었기에 대대 병력을 투입해서 단속을 했었다. 하지만 시민군이 전국에 걸쳐 봉기를 하면서 그들을 진압해야 했기에 단속 병력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보원이 말했다.

“지금은 단속반으로 투입되는 애들이라고 해봐야 소대 수준이에요. 많으면 스무 명? 그 정도면 막을 만하죠.”

보원은 집에서와는 달리 암시장에 나오자마자 말이 많아졌다. 잘 아는 분야에 대한 자신감이었는지, 아니면 해방감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생각보다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보원은 원진의 손목에 감겨 있는 종이 밴드를 가리켜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 팔찌 안 끊어지게 조심하세요. 끊어지면 자경단 보호를 못 받으니까.”

원진은 팔에 감긴 종이 밴드의 상태를 살폈다. 모양은 예전 클럽에서 감아주는 잘 끊어지지 않는 재질의 종이를 사용했지만 이건 스치기만 해도 끊어질법한 조악한 종이로 만들었다.

“출입증은 어디서 났어요?”

“암시장 다녔던 사람의 소개로 받는 거예요. 일종의 다단계 같은?”

계엄군의 단속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원진은 보원을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4층 치과를 지나고 5층으로 올라서자 입구 상단에 커다랗게 <The Fox>라고 쓰인 간판이 반쯤 깨진 채 붙어있었고, 양옆으로 머리가 깨진 동상이 서 있었다. 로비로 보이는 곳엔 레드 카펫이 깔려 있었지만 여기저기 뜯겨져 있었고 카운터로 쓰였던 곳엔 총을 멘 자경단원이 모니터 한 대를 놓고 지켜보고 있었다.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미니 분수를 지나 복도로 들어서니 문이 활짝 열려 있는 룸이 양옆으로 나열해 있었다. 그 안엔 생필품들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었는데 신기한 건 잔뜩 쌓아놓은 것이 아니라 샘플 형태로 딱 한 개만 놓여 있었고 나머지는 여행 가방에 들어가 있었다.
룸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고르는 손님들의 모습은 원진이 알고 있던 마트에서 장을 보는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동작이 빨랐고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으면 바로 빠져나갔기에 유동인구는 많았지만 생각보다 붐비지는 않았다.
보원이 기저귀가 있는 곳으로 향하자 그를 따라 나서며 원진이 물었다.

“세상이 망했어도 건물주는 건물주군요. 이런 식으로라도 돈을 벌 수 있으니까.”

보원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말했다.

“계엄령 선포되고 나서 돈 있는 놈들은 건물 사들이느라 더 바빠졌어요. 부동산 시세가 바닥을 쳤으니 헐값에 주워 모으는 거죠. 누구는 이렇게 기저귀 하나도 제대로 못 사는데. 쯧.”
나라 경제가 힘들어질 때마다 국민들은 나라 경제를 살리겠다고 아기 돌 반지까지 팔아서 모으는 동안, 부자들은 더 많은 재산을 불렸다. 이자 감당이 안 되어 나온 아파트를 사고, 경매로 나온 건물을 사고. 그건 세상이 이렇게 몰락한 후에도 변함이 없었고 그 사실 자체가 우울하게 느껴졌다.
보원은 몇 개 없는 기저귀를 주워 담으며 중얼거렸다.

“그냥 헌 옷을 기저귀 대용으로 써도 될 것 같은데, 꼭 이렇게 1회용 기저귀를 찾아요. 이게 말이 됩니까?”

원진은 마음에도 없는 맞장구를 쳐주었다.

“자식 생각하는 부모 마음이겠죠.”

보원이 말했다.

“내 자식 좋은 거 해주고 싶은 거야 당연하죠. 그런데 이런 난리 통에 기저귀까지 챙겨야겠냐는 거죠.”

보원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기저귀를 챙겨들며 물었다.

“뭐 필요한 거 없으세요? 신세도 지고 있으니 어느 정도 보은을 좀 하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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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기저귀를 만지작거리며 툭 던지듯이 말했지만, 원진은 보원이 필사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며칠이라도 더 집에 묵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물론 원진은 단칼에 거절할 생각이었다. 서바이벌 물품이 눈에 띄기 전까지는.
맞은편 룸에서 ‘서바이벌 키트’란 이름으로 비상식량과 라이터, 칼과 줄 톱, 은박으로 만들어진 얇은 담요 등을 담은 사각형 철제 박스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럼 그럴까요?”

뜻밖의 허락에 보원은 원진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럼 한 번 골라보세요. 저는 잠깐 다른 층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이따 같이 가시죠.”

“괜찮습니다. 금방 올 겁니다.”

그는 원진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휑하니 사라졌다. 원진은 결코 그가 걱정되어서 같이 가자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자체가 불안했고 행여나 무슨 일을 당하면 쌈닭인 그의 마누라가 자신을 물어뜯는 소리가 듣기 싫었을 뿐이었다.
원진은 서둘러 가는 보원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자 보원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원진은 애써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같이 가자고요.”

보원은 당황했을 때 나오는 특유의 표정을 지었다. 눈썹은 팔자가 되었고 입술은 웃었다. 하지만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려 전반적으로 어색한 표정이 되었다. 보원은 천천히 원진의 팔을 풀어내며 말했다.

“저는 진짜 괜찮아요.”

말귀를 못 알아듣고 다시 몸을 돌리는 보원의 어깨를 다시 잡았다. 그러자 보원은 인상을 쓰며 원진의 팔을 뿌리쳤다. 보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구겨진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감정 전달이 되었다.
이번에 당황한 사람은 원진이었다. 솔직히 표현하자만 만만하게 봤던 보원에게 한 방 제대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순 없었다. 만만한 보원에게 호구로 보일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감정 섞인 손길로 다시 그에게 손을 뻗었다.
보원은 원진의 손목을 잡는 듯하더니 손목에 감겨 있던 종이 밴드를 뜯어버렸다. 원진이 당황한 순간 보원은 복도 반대편 출구로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사이렌이 울린 건 그때였다.
확성기를 든 자경단원 하나가 나타나 큰소리로 외쳤다.

“모두 뒷문으로 나가세요! 계엄군이 떴습니다! 계엄군이 떴습니다!”

소방 훈련이라도 해 온 것처럼 자경단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패닉에 빠진 고객들을 뒷문으로 유도했다. 상인들은 빠른 동작으로 여행 가방을 챙겼고 자경단은 동료들과 끊임없이 통신을 하며 그들을 독촉했다.

“에이 씨! 적당히 챙기라고!”

자경단원의 안내에 따라 움직이던 원진은 갑자기 들린 고함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상인은 이미 가득 찬 가방에 물건을 조금이라도 더 넣기 위해 애를 썼고 똥줄이 탄 자경단원은 그를 억지로 끌고 나가려 했다.
원진이 다시 시선을 돌리고 뒷문으로 향하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가슴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총을 든 자경단이 원진에게 물었다.

“넌 뭐야?”

“네?”
그는 총부리로 종이 밴드가 없는 원진의 손목을 가리켜 보였다. 원진은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 뜯어져 가지고… 한 번만 봐주세요.”

“뜯어진 건 어디 있는 데?”

원진은 보여줄 수가 없었다. 보원이 들고 가버렸기 때문이다.

“제 친구가 가지고 있습니다.”

“친구는 어디 있는데?”

“저쪽 뒷문으로 나갔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아래로 처져 있던 자경단원의 총부리가 다시 원진의 가슴으로 향했다.

“꺼져.”

원진은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숙여 보이고 다시 뒷문으로 나가려는 순간 자경단원이 예민하게 반응하며 원진의 가슴을 총구로 쿡 찌르며 다시 말했다.

“뒤로 물러서라고, 새끼야!”

그의 고함소리에 도망을 치던 사람들이 힐끗 돌아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리고 도망치는데 열중했다. 관심을 보이는 건 다른 자경단원들 뿐이었다. 확성기를 들고 있던 자경단원이 다가와 동료에게 물었다.

“뭐야?”

“밴드가 없어.”

손목을 훑어본 그는 원진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물러서.”

“하지만 저는….”

“물러서라고.”

그는 목소리를 크게 내진 않았지만 원진이 느끼는 압박감은 조금 전의 녀석보다 훨씬 묵직하게 느껴졌다. 그는 동료들이 고객과 상인들을 모두 내보내는 동안 원진 앞에 서서 그를 지켜보았다.

“제 친구한테 물어보면 아실 거 아닙니까.”

원진의 호소에 그가 말했다.

“미스터리 쇼퍼가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있지. 놈인지 년인지는 모르지만 그 새끼가 나타나면 10분 만에 계엄군이 들이닥친다더군. 지금처럼.”

밖에서 총격전이 벌어진 소리가 들렸다. 놈은 무전기에 귀를 기울이고는 서둘러 뒷문으로 향하려 했다. 원진이 따라나서려고 하자 놈은 갑자기 뒤로 돌아 개머리판으로 복부를 가격했다. 빠르고 간결한 동작이었기에 이런 상황에 익숙한 원진이었지만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는 자신의 어깨너머로 원진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뒷문으로 사라졌다.
원진은 밖에서 들려오는 총격전 소리를 들으며 이를 악물고 호흡을 길게 하며 통증을 가라앉혔다. 이대로 있다가 계엄군에게 잡히는 순간 끝이었다. 무엇보다 보원을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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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중앙대학교 졸업. IT 회사 입사, 경영기획, 전략기획, 사업제휴 등의 다양한 직무 경험.
1999년 포털사이트에 <왼팔> 연재. 2001년 출간. 이후 소시오패스를 전면에 내세운 액션 스릴러 <Business is business>(2010), <유령 리스트>(2015)로 액션물 출간.

2001.08 「왼팔」
2003.03 「왼팔II」
2005.07 「적경」
2008.06 「피해의 방정식」 (한국 스릴러문학단편선)
2010.01 「위험한 오해」 (한국 스릴러문학단편선II)
2010.10 「Business is business」
2013.11 「사이비」 (원작 : 연상호)
2014.03 「조난자들」 (원작 : 노영석)
2015.08 「유령 리스트」
2015.10 「살인의 기원」 2015 부산영화제 북투 필름 피칭작 선정
2016.04 「왼팔 rebuild」
2016.04 「블랙러시안」, 「증오」, 「복수의 미학」 (맨 헌터 태성 시리즈)
2016.05 「십이 죄」
2016.07 「세일즈 플래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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