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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드라마 속 광종이 난폭한 인물로 그려진 까닭은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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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과 실제 역사 - 고려 초 왕실 계보

어느 날 갑자기 고려시대로 날아간다면? SBS TV드라마 ‘달의 연인 보보경심-려’의 여주인공 해수처럼 말입니다. 혹시 아나요. 해수가 그랬듯 여러 황자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역사 공부 좀 해둘 걸…’ 하는 후회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고려가 어떤 나라인지,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알고 있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테니까요. 드라마의 주요 인물을 토대로 고려 초의 왕실 계보를 간단히 살펴봤습니다. 타임 슬립까지는 몰라도, 드라마를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요.

고려사 알아보기|고려는 어떤 나라였을까

고려(918~1392)의 특성은 다원사회입니다. 쉽게 말하면 다양성을 가진 나라입니다. 흔히 고려는 불교, 조선은 유교를 국교로 알고 있죠. 그런데 태조 왕건이 작성한 ‘훈요십조’를 보면 불교가 건국에 큰 역할을 했음을 인정하면서도 승려가 정치에 관여하는 등의 폐단을 경계합니다. 또 풍수지리와 도교, 유교를 받아들이며 사상의 다양성을 인정했어요. 다원사회는 고려 건국 과정에서도 엿보입니다. 고려 건국 후에도 옛 백제 지역에는 백제식 목탑이, 신라에는 신라식 석탑이 그대로 조성됐죠. 옛 삼국의 문화를 존중한 겁니다. 또한 대외무역에 개방성을 보였고, 사회적으로는 신분이동이 활발한 역동성을 띈 나라로 풀이되고 있습니다.

태조 왕건(王建) 고려 제1대 왕 877~943(태조 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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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은 918년에 고려를 건국하고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했죠. 드라마에서 호방하지만 섬세한 인물로 나오는 왕건의 실제 장점은 정치력과 포용력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문덕(文德, 학문의 덕)을 쌓는 유교의 가치를 알았지만, 나라를 세울 때는 불교에 뜻을 두었습니다.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불교가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 힘 있는 지방 호족과 동맹을 맺기 위해 그들의 딸과 결혼했죠. 기록으로 남은 부인은 29명. 왕이 된 후 맞은 왕비는 모두 정략결혼 대상이었고 대부분 대호족 출신이었습니다. 다만 큰아들 왕무의 어머니 장화왕후는 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만나 상대적으로 신분이 낮은 호족 출신이었죠. 드라마에서는 왕무에 대한 왕건의 애정이 지나치다는 설정인데요. 실제로 왕건이 왕무를 편애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측근인 무신 박술희에게 왕무를 부탁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왕무의 외가 세력이 약한 것을 염려하고, 왕위 계승이 원활하도록 당부한 겁니다.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 황후 유씨 출생·사망 연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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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가 고려를 세운 후 맞은 첫 번째(제3 왕비)입니다. 후백제·신라와 연결되는 교통 요충지 충주의 가장 큰 호족 유긍달의 딸이죠. 신명왕후는 태조와의 사이에서 다섯 아들과 두 딸을 두었습니다. 그중 왕요는 3대 정종, 왕소는 4대 광종이 됐죠. 또 5대 경종은 친손자, 7대 목종은 증손자입니다. 신명왕후는 사후에 신명순성왕태후로 추봉(임금 또는 왕족이 죽은 후 존호를 올리던 제도)됐습니다. 광종은 왕으로 즉위한 후 어머니의 원당(죽은 사람의 위패 등을 모신 법당)으로 불일사를 세웠고, 954년에는 사찰 숭선사를 세워 명복을 빌었습니다.

신정왕태후(神靜王太后) 황후 황보(皇甫)씨 ?∼983(성종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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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의 제4 왕비입니다. 태조가 즉위하고 두 번째로 왕비가 됐죠. 군사 요충지 황주의 호족이자 고려 개국공신인 황보제공의 딸로, 왕자 대종 왕욱과 왕녀 황보연화의 어머니입니다. 드라마에서 그는 덕이 많고 슬기로워 백성의 존경을 받지만, 황제의 어미가 되고 싶다는 야망도 드러냅니다. 하지만 아들 왕욱 대신 손자들이 그 꿈을 실현하죠. 5대 경종은 신정왕후의 외손자고, 6대 성종(왕욱의 아들)은 친손자입니다. 특히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신정왕후 밑에서 자란 성종은 983년 할머니가 죽자 크게 슬퍼하며 신정왕태후로 추봉했습니다.

고려사 알아보기|고려시대 여성의 지위

드라마 속 대목왕후는 여인으로 태어나 왕위 계승에서 멀어진 걸 아쉬워하는 캐릭터죠. 실제로 여성이 왕위를 잇지는 못했으나, 고려 여성의 지위는 조선보다 높았던 게 사실입니다. 여자도 상속권이 있었으며 재혼도 자유로운 편이었습니다. 또 조상 제사도 남녀 구분 없이 받들었으며 일부일처제가 원칙이었죠. 다만 왕이 족내혼(같은 부족 내에서의 결혼)과 이성혼으로 후비를 여럿 두었던 것에 반해 사대부와 일반 백성은 이성혼을 원칙으로 했습니다. 왕실의 동성근친혼의 경우 왕비는 외가의 성을 따랐습니다.

혜종(惠宗)
정윤(正胤) 왕무(王武) 912~945(혜종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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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은 921(태조 4)년 12월에 왕무를 정윤(태자)으로 책봉합니다. 왕무가 10세 때죠. 왕건은 고려를 세우던 무렵에 이미 왕무를 왕위계승자로 생각했으나 바로 추진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대신 상자에 군주를 상징하는 자황포(중국 황제가 입던 적황색 포)를 넣어 장화왕후에게 건넸죠. 후에 장화왕후로부터 이 상자를 받아본 박술희가 왕무를 태자로 책봉하도록 요청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드라마 속 왕무는 무예가 뛰어나고 겸손하지만 좋은 황제가 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표현됩니다. 왕무 즉, 혜종은 재위 기간이 짧고(943년 5월~945년 9월) 기록도 부족해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어요. 다만 최승로(고려 문신)는 혜종의 태자 시절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감국(監國, 태자로서 나라를 보살핌)과 무군(撫軍, 임금을 따라 군대에 나가거나 군사를 위로하는 일)을 잘했고, 스승을 공경하고 빈객과 신료를 잘 대했다.’ 이렇게 명성이 높았던 혜종이 즉위하자 사람들이 기뻐했다고 합니다.

정종(定宗)
왕요(王堯) 923~949년(정종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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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말기와 혜종 때는 후계자 갈등으로 혼란스러웠습니다. 특히 신명왕후를 중심으로 한 충주 호족과 대광 왕규를 중심으로 한 광주 호족이 주요 세력이었죠. 대광 왕규는 태조에게 두 딸(15비 광주원부인, 광주원군(드라마 속 왕은)을 낳은 16비 소광주원부인)을 시집 보낸 개국공신이나, 태조가 죽고 왕권의 적대세력이 됩니다. 왕규는 혜종에게 태조의 둘째 아들 요(정종)와 셋째 소(광종)가 반란을 꾀한다고 고발(혜종은 왕규를 신뢰하지 않았다 합니다)하고,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려 혜종을 죽이려다 실패합니다. 왕규는 결국 왕요의 세력에 밀려 죽고, 왕요는 945년(혜종 2년) 9월 왕위에 오릅니다. 3대 왕 정종은 큰 불교행사를 자주 열고, 서경으로 천도할 계획을 추진합니다. 또 광군(거란의 침입에 대비한 군사조직) 30만 명을 조직하죠. 고려 초기 왕실의 군대 장악력이 확대됐음을 뜻합니다. 하지만 재위 4년 만에 27세로 사망합니다.

광종(光宗)
왕소(王昭) 925~975(광종 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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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은 26년간 재위하며 고려의 기틀을 다진 왕입니다. 그의 초기 정치는 태조와 더불어 가장 이상적이라 꼽히곤 하죠. 드라마 속 광종 역시 중요한 인물로 나옵니다. 다만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고 광폭해진 인물로 묘사되죠. 이와 달리 역사 속 광종은 왕권 기반을 다지기 위해 개혁을 추진하고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 안목을 갖춘 인재를 선발한 왕입니다. 후주 사신단으로 고려를 찾은 중국인 쌍기의 제안으로 과거제를 도입, 호족의 추천으로 관리를 임명하던 것에서 벗어나게 되죠. 광종에서 성종까지 모두 11호의 과거를 운영하는데 공헌한 오월 출신 왕융도 중국 귀화인이었어요. 또한 노비를 조사해 원래 평민이었던 사람의 신분을 찾아주는 ‘노비안검법’을 시행했습니다. 광덕·준풍 같은 연호(황제가 즉위한 뒤 1년을 세는 단위)도 만들었어요. 연호는 태조 왕건 때부터 사용했지만, 광종은 스스로 황제라 부르며 개경을 황도(皇道, 황제가 사는 도읍)라 일컬었죠. 고려의 위상과 왕권을 나라 안팎으로 과시한 겁니다. 다만 재위한지 11년이 지나면서 왕권 강화에 방해가 되는 외척과 개국공신들을 숙청하기 시작했죠. 광종을 난폭한 왕으로 묘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려사 알아보기|고려 초기 왕실의 근친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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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 왕실 계보를 보면, 광종 대부터 눈에 띄는 점이 있습니다. 바로 근친혼이죠. 태조와 신정왕후의 딸 황보씨(대목왕후)는 광종(4대)과 혼인합니다. 두 사람의 아들 왕주가 5대 경종이며, 그는 대종 왕욱(태조와 신정왕후의 아들)의 두 딸을 왕비로 삼습니다. 왕욱의 둘째 아들은 6대 성종이고요. 성종은 문덕왕후(광종과 대목왕후의 딸)와 결혼합니다. 이러한 근친혼은 태조의 아내 충주 유씨 신명왕후와 황주 황보씨 신정왕후(드라마에 주로 나오는 두 왕후) 두 축을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혼인을 통해 혈통을 강화했음을 알 수 있죠. 6대 성종, 8대 현종을 거치며 다른 가문과 혼인이 늘어납니다.

대목황후 (大穆王后)
황보연화 출생·사망 연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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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와 신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딸입니다. 4대 왕 광종의 이복누이이자 부인이 되죠. 대목왕후가 광종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5대 왕 경종입니다. 그는 노비안검법으로 광종과 대립한 것으로도 알려집니다.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의 신분을 찾아주는 노비안검법은 호족 소유의 노비를 평민으로 해방시켜 경제적·군사적 기반을 축소하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대목왕후는 노예들이 주인을 멸시하고 배반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며, 이 법을 중지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예성선경대왕 (睿聖宣慶大王)
대종 왕욱(戴宗 王旭) ?∼969(광종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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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서 광종 다음으로 부각되는 대종 왕욱은 태조와 신정왕후의 아들로 대목왕후와 친남매입니다. 고려판 ‘뇌섹남(두뇌가 매력적인 남자)’으로 묘사돼 왕위를 다투는데, 실제로 왕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이복누이인 선의왕후 유씨(태조와 제6비 정덕왕후의 딸)와 혼인해 5대 경종의 왕비가 되는 헌애왕후·헌정왕후, 6대 왕 성종을 낳습니다. 7대 목종과 8대 현종의 외조부고요. 성종은 아버지를 예성선경대왕으로 추존(追尊, 생전에 당위를 잇지 못했거나 폐위된 임금을 사후에 왕으로 모시는 일)했습니다.

효의대왕 (孝懿大王)
안종 왕욱(安宗 王郁) ?∼996(성종 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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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의 여덟 번째 아들입니다. 신라 경순왕의 큰아버지 김억렴의 딸인 신성왕후(태조의 5비) 김씨가 낳았죠. 드라마에선 예술에 안목 있는 미남으로 나오지만 역사에는 불륜으로 기록됩니다. 경종이 죽은 후 대궐을 나온 헌정왕후(경종의 4비)와 정을 통한 사건입니다. 헌정왕후는 왕순(8대 왕 현종)을 낳고 바로 세상을 떠났고, 안종은 당시 왕인 성종에 의해 유배를 가죠. 성종은 친조카 왕순이 자라자 유배지의 안종에게 보내 함께 살도록 해줍니다. 1009년 왕위에 오른 현종은 아버지를 효의대왕으로 추존했습니다.

글=이세라 기자 slwitch@joongang.co.kr, 도움말=김인호 원광대 인제니움학부 교수, 참고도서=『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웅진지식하우스) 『새로 쓴 5백년 고려사』(푸른역사), 『알기 쉽게 통으로 읽는 한국사』(시공주니어),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콘텐츠, 사진=웅진지식하우스(출판사), 바람이분다(드라마 제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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