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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을 홀리는 게임의 법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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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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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현
편집국 EYE24 차장

#1. “마음껏 실패해도 좋을 자유를 가져 봅시다. 실패해도 멈추지 말고 다시 도전해 봅시다. 성장하는 짜릿함을, 이기는 즐거움을 알아갑시다.”

듣기만 해도 힘이 솟는 격려이자 선동이 TV에서 흘러나왔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실수는 있어도 실패는 없는 이곳은 너와 나 우리 모두를 위한 플레이 그라운드….”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말은 절망한 청춘을 다시 일으켜 세울 만큼 믿음직스러웠다. 도대체 무슨 CF이길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심장이 철렁했다. 평소 관심 밖이었던(엄밀하게는 한심하게 생각한) 게임회사 광고였다. 죽이고, 벗기고, 폭발하는 현란한 기존 CF와 달리 게임의 가치와 본질,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도전과 실패, 승리의 주인공은 앵그리버드와 레이싱카 등 게임 캐릭터이자 동시에 그들을 조종하는 초·중·고등학생을 포함하는 수백만 유저인 셈이다.
게임에서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배운다고 하니 게임하겠다는 아이들을 무슨 수로 막을 것인가.

마지막 문장이 정신을 차리게 해 주지 않았다면 자칫 ‘게임 전도사’가 될 뻔했다. "즐거움을 멈추지 마세요. 플레이를 멈추지 마세요. 즐거움을 플레이하세요."
게임 매출을 올리려는 의지가 엿보이는 광고 문구대로 멈추지 않는 아이들은 스마트폰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

#2. 비슷한 충격을 받은 광고가 2년 여 전에 있었다. ‘강남스타일’로 월드스타가 된 싸이가 나오는 놀이공원 CF였다.

“놀아본 아이가 크게 자란다~ 안 놀면 지는 거다~” 에드워드 엘가의 교향곡 ‘위풍당당 행진곡’의 선율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인 싸이가 노래하고 춤췄다.

그에게는 딱 떨어지는 광고 카피였다. 강남 압구정동과 청담동에서 단련된 그만의 놀이를 댄스 음악으로 승화시키고, 세계적인 히트곡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그런데 노는 아이는 모두 싸이처럼 자라나. ‘크게 자랄’ 확률엔 형평의 원칙이 적용되진 않는다.

#3. 재기발랄한 광고 카피에 죽자고 덤벼드는 게 아니다. 두 CF가 떠오른 것은 12일 뉴스로 전해진 어이없는 폭주 사건 때문이었다.

수입 스포츠카를 타고 고속도로 터널 안에서 시속 200㎞로 레이싱을 했다. 안전을 위해 차로 변경까지 금지되는 곳에서 말이다. 적발된 20, 30대 폭주족 42명 중 한 명은 언론 인터뷰에서 "이기면 승리한 쾌감, 지면 짜증나는 거죠”라고 말했다.

이기는 즐거움을 알고, 놀아본 아이로서의 자신감이 넘치는 인터뷰였다. 광고 속 ‘게임의 법칙’의 안 좋은 예들이 모인 결과다.

나의 게임이 다른 사람의 소중한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는 염려가 없었다. 어떤 실수는 공동체에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려도 없었다.
그들에게 분노하면서도, 과연 나는 플레이를 멈출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게임의 룰을 배웠는지 새삼 궁금해졌다. 나 또한 또 다른 세계의 폭주족이 아닌지.

김승현 편집국 EYE24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