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M] 기억을 잃어도 이 남자의 매력은 끝이 없지! '럭키' 유해진

중앙일보

입력 2016.10.14 00:01

업데이트 2016.11.0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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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키` 유해진 [사진 쇼박스 제공]

성공 확률 100%, 냉혹한 킬러 형욱(유해진)은 이날도 의뢰받은 사건 처리 후 목욕탕에 들른 참이었다.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하려는 순간, 아뿔싸, 비누를 밟고 넘어진다. 그리고 기억을 잃는다. 한편, 빈털터리 무명 배우 재성(이준)은 그저 죽고 싶은 마음뿐이다. 자살 직전, ‘몸이라도 깨끗이 씻고 죽자’는 생각에 찾아간 목욕탕. 그곳에서 우연히 형욱과 마주친 그는, 형욱이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목욕탕 키를 몰래 바꿔치기한다.

병원에서 깨어난 형욱은 옆에 놓인 재성의 짐을 보고 자신을 재성이라 착각한다. 형욱 행세를 하기 시작한 재성이 제 돈을 펑펑 쓰는 것도 모른 채. ‘럭키’(10월 13일 개봉, 이계벽 감독)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킬러가 새로운 관계를 쌓고 새로운 기억을 만들며 변화하는 과정을 그린 코미디영화다. 쉴 틈 없이 웃기다 따뜻하게 마무리되는 이 이야기는, 누가 뭐래도 ‘유해진의 영화’다. 그의 표정만 바라봐도, 비장한 한마디만 들어도 웃음이 터진다. 친근하면서도 새로운 모습으로 ‘럭키’한 기운을 가져온 유해진(46)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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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쇼박스 제공]

누가 뭐래도 ‘럭키’는 ‘유해진의 영화’라 할 만하네요. 영화를 직접 보니 어떠셨어요.
 “아우, 잘 모르겠어요. 제가 어떻게 제 연기를 평가하겠어요. 관객이 어떻게 봐 줄지 궁금할 뿐이죠. 다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영화로 만들면 분명 재미있겠다’는 믿음이 있었어요. 유머도 있고 ‘하찮은 인생이란 없다’는 메시지를 슬쩍 던져 주는 점도 좋았고요.”
그 웃음의 대부분이 배우 유해진의 매력에서 나오잖아요. 킬러였던 형욱이 과거 기억을 잃은 채 분식점에서 일하는 장면이 대표적이죠. 워낙 칼을 다루는 데 능숙한 사람이다 보니, 김밥을 썰어도 예술이고. 본인은 심각한데, 정작 보는 사람은 그 모습이 너무 웃긴 거예요.
 “그럼요, 저는 진지해야죠. 그동안 코믹한 연기를 많이 했잖아요. 그런데 코미디영화는 절대 ‘코미디’로 접근하지 않아요. 오히려 ‘정극’이라 생각하죠. 가벼운 말장난보다 상황이 자아내는 웃음을 ‘진짜’라고 보니까요. 그러려면 먼저 배우가 그 상황을 진심으로 믿어야 해요. ‘해적:바다로 간 산적’(2014, 이석훈 감독, 이하 ‘해적’)을 예로 들면, 저는 그 영화에서 전직 해적 철봉 역을 맡았잖아요. 산적들 앞에서 고래를 설명하는 저는 장면이 히트를 쳤고요. 그 장면을 연기할 때 웃기려 했을까요? 아니요, 정말 진지했어요. 배우가 ‘어떻게 웃길까’에만 신경 쓰면 관객이 먼저 눈치채요.”
그래도 코믹한 장면을 찍다 보면, 웃겨서 NG가 나기도 하지 않나요.
 “나이가 드니까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왜 그렇게 웃긴지 모르겠어요. 형욱이 분식점에서 일하는 장면을 찍는데, 혼자 너무 웃겨서 웃음 참느라 혼났어요. 엄청 비장하게 칼질하더니 기껏 내놓는 게 아기자기한 김밥이잖아요. 그 설정이 왜 그리 웃긴지….”
그런 장면에서는 애드리브도 많이 나올 것 같은데요.
 "음…, 사실 애드리브를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에요. 철저히 준비한 후 연기하는 걸 훨씬 좋아하거든요. 애드리브는 상대 배우와의 약속을 깨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물론 연기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우리 진짜 편하게 한 번 해 보자’ 하는 경우는 있죠. 이계벽 감독님은 워낙 배려심이 많고 넉넉한 사람이라, 무엇이든 충분히 논의하고 진행할 수 있었어요.”
유머도 유머지만, 무명 배우로 새롭게 살아가는 형욱의 모습이 무척 짠했어요. 이를테면 엑스트라 아르바이트하려던 그가 끌려가듯 차에 실려 사극 촬영장으로 향하는 장면이요.
“제가 직접 겪은 일이다 보니 감정 이입이 잘됐고, 그게 관객에게도 전해지겠죠. 영화 속 옥탑방이 제가 20대를 보낸 서울 아현동 옥탑방과 너무 흡사해서 더 옛 생각났어요. 그 시절에는 돈이 없어 친구네 집에 얹혀살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배우가 된 지도 시간이 꽤 흘렀잖아요. 이제는 그런 기억이 가물가물할 법도 한데요.
“그럴리가요. 그 시간은 너무 진한 기억이에요. 극단 생활까지 합하면 30년 정도 배우로 살았으니, 무명 시절이 꽤 길었어요. 그걸 어떻게 잊어요. 아우, 아직도 너무 또렷해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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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쇼박스 제공]

기억을 잃기 전의 킬러 형욱과 기억을 잃은 후의 무명 배우 형욱은, 분명 같지만 다른 인물이죠. 연기 톤을 잡는 게 힘들진 않았나요.
“기억을 잃은 것이지, 사람의 본질이 바뀌지는 않았다고 봤어요. 그래서 ‘재성으로서의 삶’에 점차 익숙해지는 형욱의 모습을 표현하되 급작스러운 캐릭터 변화는 피했죠.”
만약 기억이 사라진다 해도 남아 있을 ‘유해진만의 것’은 무엇일까요.
“모두 사라져도 ‘예민함’은 남을 것 같아요. 아마 쉴 때 가만히 있지 못하고, 어디로든 가서 땀 흘리는 습관도 남아 있겠죠? 아우, 사실 예민함은 참 징글징글해요. 평소 ‘이러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도 중요한 촬영을 앞두면 ‘이걸 어쩌나’ 싶어 잠 못 이루죠.”
‘완벽함’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에이, 완벽주의라기보다…, 직업병이에요. 아마 배우라면 누구나 그럴 거예요. 힘든 상황에서도 늘 여유를 지키는 (손)현주 형 같은 사람들을 보면 진심으로 부럽죠.”
그렇다면 형욱과 재성의 경우처럼, 누군가와 인생을 바꿔 살아 보고 싶은 적도 있었나요.
 “아뇨. 삶은 누구에게나 힘든 거니까, 다른 이의 인생 역시 힘들겠죠. 저는 스스로 ‘복 받은 사람’이라 생각해요. 그래서 늘 감사하죠. 철딱서니 없이 친구들과 낄낄대던 10대 시절이 종종 그립긴 하지만, 나 아닌 다른 누군가로 살고 싶지는 않아요.”
형욱은 모든 것을 잃었어요. 하지만 결국 그 덕분에 ‘럭키’한 상황을 맞게 되잖아요. 혹시 비슷한 경험은 없나요.
“모든 것을 잃었다기보다, 너무나 막막하고 힘들었던 순간이 오히려 약이 된 경험은 있죠. 가끔 캐릭터의 감정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이해하지 못하니 표현할 수도 없죠. 그럴 때 상당히 외로워요. 어느 누구도 그 역할을 대신해 줄 수 없으니 도망치고 싶어져요. 그런데 그런 연기를 어찌어찌 해내면 ‘물러서지 않기를 잘했구나’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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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쇼박스 제공]

최근에는 어떤 영화가 그랬나요.
 “‘이끼’(2010, 강우석 감독)요. ‘덕천’이라는 인물은, 온전치 않은 정신으로 매번 횡설수설하는데도 그 말에 뼈가 있거든요. 이 역할을 도대체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패닉에 빠져서 제주도로 내려갔어요. 연극하던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가 하루 종일 걸어다니며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그렇게 보름 동안 준비했어요. ‘이끼’처럼 몰입도가 높아야 하는 촬영 현장에서 NG를 내면, 그 감정을 도저히 다시 잡기가 어렵거든요.”
요즘도 그렇게 연습하나요.
 “아, 매번 그렇게 제주도에 가는 건 아니에요. 하하. 하지만 어떤 작품이든 일단 촬영에 들어가면, 항상 그 인물과 장면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파고들죠.”
무척 성실한 것 같아요. TV 예능 프로그램 ‘삼시세끼’(2015~ 2016, tvN)에서도 틈만 나면 밖으로 나가서 걷고 뛰고.
 “성실하다기보다 땀 흘리는 걸 좋아해요. 요즘 ‘택시운전사’(장훈 감독)를 찍고 있는데, 굉장히 깊은 산속에서 촬영해요. 아무리 바빠도 산에서 내려가는 길에 꼭 한 바퀴씩 뛰어요. 하하. 일이 없을 때도 아침마다 산이든 강이든 가는 편이에요. 그런 다음에 밥 먹고, 극장이나 교보문고에 가죠. 서울 삼청동 골목을 걷다가 커피를 마시기도 해요. 저녁에는 주로 사람들 만나고.”
그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갖기 어려울 것 같은데요? 워낙 배우 유해진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아서.
 “필요로 하는 곳도 많지만, 버려질 때도 많아요. 으하하.”
‘럭키’ 촬영 현장은 어땠나요.
“와아, 활기가 돌았죠. ‘해적’ 촬영 현장이 몸에 좋은 들깨탕 같았다면, ‘럭키’는 샐러드 같았어요. 상큼하고 푸릇푸릇하고. 이준은 굉장히 열심히 연기하는 친구였어요. 오히려 제가 배울 것이 많을 만큼. 액션신이 끝나면 모니터링을 꼼꼼히 하더라고요.”
이제 촬영 현장에서 많은 배우들에게 선배 역할도 해야겠어요.

  “아무래도 후배들과 함께 있으면 이런저런 조언을 하게 돼요. 그런데 정말 조언하는 것에서 그쳐요. 배우에게는 각자의 연기 플랜이 있으니까. 또 연기에는 정답이 없으니까. 요즘은 필름이 아닌 디지털 시대잖아요. 예전보다 배우로서 더 다양하게 시도할 수 있죠. 그런 기회가 있어 좋은 것 같아요. 그렇다 보니 후배들이 조금 더 도전해 줬으면 좋겠다 싶기는 해요. 하지만 절대 강요하지는 않아요, 아무리 답답해도.”
‘꼰대’처럼 보일까 봐 두려운 게 아닐까요.
“맞아요, 꼰대! 딱 그 단어죠. 정말 그런 고민을 많이 해요. 꼰대가 되기는 싫어서, 후배들에게 이야기할 때는 더 조심하죠.”
지금까지 30여 년을 무대 위 그리고 카메라 앞에서 보냈어요. 앞으로도 그 이상의 시간만큼 배우 유해진을 볼 수 있겠죠?
 “모르죠, 뭐. 으하하. ‘충분히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감사한 마음으로 주어진 길을 잘 걸어가고 싶어요. 계획을 세운다고 해서 어차피 상황이 마음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니까. 다만, 이런 원칙은 가지고 있어요. ‘끝까지 의심하자.’ 연극할 때 배운 자세인데,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는 끝까지 점검하고 의심하자’는 거예요. 지금도 그래요. 끝까지, 정말 끝까지 의심하자.”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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