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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 엘만은 음악시간에 입만 벙끗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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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충남 아산시 신창면에 위치한 신창초등학교에서 음악수업이 진행중이다. 이 학교에는 한반에 평균 3명 정도의 중도입국자녀들이 재학중이다. 오상민 기자

지난달 30일 충남 아산시 신창면 신창초등학교의 5학년 음악수업 시간. 30명 남짓한 반 아이들이 노래 ‘손에 손잡고’를 부르고 있었다. 그 속에서 입만 벙끗거리는 이국적 외모의 아이가 눈에 띄었다. 2학기에 전학 온 우즈베키스탄 출신 엘만(12·가명)이다. 그는 시선을 책상으로 내리깔고 선생님과의 눈맞춤은 애써 피했다. 이 학교 김한솔 교사는 “배운 지 2주 만에 한글을 또박또박 읽을 정도로 똑똑하지만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는 못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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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만은 ‘중도입국 자녀’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지만 국적은 여전히 우즈베키스탄이다. 한국말이 서툴러 친한 친구도 아직 없다. TV를 틀어 놔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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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만과 같은 처지인 중도입국 자녀는 2012년 4288명에서 올해 7418명으로 4년 새 73% 늘었다. 이 수치는 초·중·고교 등록자 기준이다. 학교에 간 적이 없는 경우는 집계되지 않는다. 국무총리실 산하 여성정책연구원은 국내에 1만2000여 명의 중도입국 자녀가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외국인 노동자와 국제결혼이 많아지면서 중도입국 자녀도 빠른 속도로 늘고 있지만 이들은 정부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정부의 다문화가정 지원 정책이 국제결혼 부부나 이민자 부부가 한국에서 낳은 2세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 출신 외국인 노동자가 많이 사는 아산시의 신창초 사례는 중도입국 자녀에 대한 정부 지원 필요성을 보여준다. 2014년 5명이었던 이 학교의 중도입국 자녀는 2년 새 8배가량 늘어 37명이 됐다. 전교생(420여 명)의 9%다. 김 교사는 “한 달에 1~2명씩 중도입국 자녀가 들어와 올해 말께에는 60명쯤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국적도 베트남·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우크라이나·벨라루스 등으로 다양하다.

이들은 언어 장벽 때문에 수업에 어려움을 겪는다. 따돌림을 당하기도 한다. 사정이 이렇지만 이들에게 따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적응 교육’은 하루에 한 시간뿐이다. 정규 교사가 아닌 계약직 강사가 수업을 한다. 통역이 가능한 직원도 없다. 김현숙 교감은 “아이를 학교에 보내겠다며 부모가 같이 와도 의사소통이 잘 안 돼 그냥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 지역에서 중도입국 자녀가 계속 늘어나자 신창중학교에도 비상이 걸렸다. 신창초를 졸업하면 대부분의 아이가 이 학교로 진학하기 때문이다.

여성정책연구원이 올해 초에 낸 ‘2015년 전국다문화가족실태조사 분석’ 보고서에 담긴 설문조사에 따르면 중도입국 자녀 중 학교에 다니지 않는 비율이 과반(56.6%)이었다. 학교에 가지 않는 이유는 문화가 달라서(27.1%), 학교 공부가 어려워서(22.3%), 돈을 벌어야 해서(17.2%) 등이었다. 중도입국 자녀 중 ‘한국어를 매우 잘한다’고 답한 비율은 37.8%에 그쳤다.한국서 태어난 다문화가정 2세들이 같은 답을 한 비율(87.4%)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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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각지대에서 자란 아이들은 성인이 된 후에도 방황하기 일쑤다. 범죄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도 크다.

중국에서 살다 들어온 중도입국 자녀가 많은 서울 영동포구 대림동에선 하릴없이 PC방을 전전하는 청소년과 20대를 쉽게 볼 수 있다. 대림동의 한 PC방에서 만난 추이민스(21·중국동포)는 한창 일하거나 공부할 나이지만 PC방에서 시간을 보낸다. 2년 전 미성년자 때 한국에 온 그는 “중국에서 실내 인테리어 관련 공부를 해서 한국에서도 같은 분야 일을 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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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초의 김 교감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이중언어 선생님을 두는 게 시급하다. 장기적으로는 정규 교사를 채용해 특수학급처럼 중도입국 아이들을 위한 통합 학급을 만들어야 한다. 이 아이들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중도입국 자녀’와 ‘다문화가정 자녀’

중도입국 자녀는 한국인과 재혼한 결혼이민자가 러시아·중국·필리핀 등 외국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자녀를 데려오거나 외국인 근로자가 한국에 오면서 데리고 온 미성년 자녀를 말한다. 한국 국적을 갖지 못한 외국 국적 청소년이다. 이들은 국제결혼 부부나 이민자 부부가 한국에서 낳아 기르는 일반적 다문화가정의 자녀와는 달리 국가 정책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다문화가족지원법 등 어디에도 관련 규정이 없어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채승기 기자 ch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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