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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풍문으로 들었소, 루이비통도 탐냈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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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명품사의 증인, 수선전문점 ‘명동사’ 김동주 회장·오창수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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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구두수선공과 견습생으로 만난 김동주 회장(오른쪽)과 오창수 사장.

“명품 가죽가방이랑 구두 수선으로 유명한 집? 명동사 말고 또 있나?”
디자이너와 스타일리스트, 홍보대행사 직원 등 패션업계 사람들에게 묻자 모두 같은 대답을 했다. 명동사, 오직 명동사뿐이라고. 1990년대는 이른바 해외 명품의 시대였다. 88 서울올림픽 후, 그 이전까지는 경험해보지 못한 해외 럭셔리 브랜드들이 국내로 물밀듯 들어왔다. 진품이든 짝퉁이든 거리엔 ‘3초마다 보인다’고 해서 ‘3초백’(모델명 스피디)이라는 별명이 붙은 루이비통 백이 인기였고, 페라가모의 리본 구두와 프라다의 검정 나일론 가방은 당시 여대생들의 워너비 아이템이었다. 럭셔리 브랜드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명동사 이름이 더 많이 들렸다. 브랜드들이 제대로 된 수선센터를 갖추지 못한 탓에 여러 브랜드의 가방과 구두가 명동사로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손님이 자기 물건을 들고 가기도 했지만 심지어 매장에서조차 의뢰받은 고객 물건을 들고 찾아왔다. 두 명으로 시작한 조그만 수선집은 그 사이 직원 수십 명이 넘는 회사로 성장했다. 지금의 명동사를 만든 김동주(73) 회장과 기술부 수장인 오창수(61) 사장을 만나 명품 수선의 인생 얘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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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초입에 있는 명동사 본점 1층. 한쪽엔 구두, 다른 한쪽엔 가방·지갑 코너가 있다. 수선이 끝 난 물건은 검정색 쇼핑백에 담겨 주인을 기다린다.

올해 창립 40년을 맞은 명동사는 여전히 분주했다. 수선품 접수 받는 데스크 안쪽으로는 수선공 7~8명이 가방을 분해하고 벨트 나사를 조이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수선할 구두에 맞는 가죽을 고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곳에선 가방·지갑·구두 등 품목별로 수선공의 전문분야를 나누고, 기술 수준에 맞춰 미싱·장식 등 세부 분야로 담당을 나눠 일한다. 이렇게 일하는 직원 수가 무려 50여 명에 달한다. 명동사는 1976년 중국 대사관 앞의 지금 본점이 있는 건물 1층의 3평(10㎡)짜리 공간에서 출발해 3층까지 접수했다. 지금은 명동 본점의 1,3층과 압구정동 강남점만 남아있지만 한때는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과 신세계백화점 본점, 롯데백화점 애비뉴엘과 부산, 대구에도 지점을 둬 직원이 100명이 넘은 적도 있었다.

-이렇게 직원이 많은지 몰랐어요.

(김동주 회장, 이하 김) “우리는 일반 수선집하고는 좀 다르지. 수선공별로 전문 분야가 다 나뉘져 있어. 경력 직원이라도 우리 매뉴얼을 다 익혀야만 정식 직원으로 인정해줘. 여기서 기술 배운 후에 나가서 자기 가게 차린 사람도 많아. 괜히 ‘명품 수선의 사관학교’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야.”

-두 분 인연은 얼마나 되셨나요.

(오창수 사장, 이하 오)”1970년 3월 15일. 정확하게 기억해요. 16살에 전라도 보성에서 서울로 무작정 상경한 직후였어요. ‘명동사’라는 이름의 구두·가방 수선집에서 김 회장님 보조로 시작했어요. 당시 시골 면서기 하던 형이 월급 7600원을 받을 때였는데, 월급 3000원을 준다는 거예요. 그것도 적지 않았는데, 아 글쎄 회장님은 1만7000원을 받는 거예요. 그걸 보고 ‘이거 계속 배우면 괜찮겠다’ 싶었어요.”

※김회장은 68년 지금의 ‘명동사’와 똑같은 이름의 수선집에서 구두 수선공으로 일을 시작했다. 15살에 전남 장흥에서 서울로 올라와 구두닦기하며 번 돈으로 양화점을 차렸지만 다 말아먹고 26살에 수선공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6년 후 을지로 롯데백화점 개발로 명동사가 없어졌고 김 회장은 76년 그 자리에 같은 이름으로 수선집을 차렸다. 이때 두 사람은 서로의 갈 길을 갔지만 몇 년 후 명동사가 확장하면서 재결합했다.

-처음부터 장사가 잘 됐었나요.

(김) “시작은 건물 구석의 3평도 안 되는 좁은 공간이었어. 하지만 밖엔 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지. 일감이 몰릴 땐 그 좁은 곳에서 하루 100만원씩 매출을 올릴 정도였다고. 결국 같은 건물 3층과 바로 옆 건물 1층 대로변에 추가로 새로운 매장을 냈어.”

-특별히 홍보를 하지도 않았을텐데 어떻게 사람들이 몰렸을까요.

(오) “지퍼 하나를 갈아도 실 뜯어낸 바로 그 구멍자국에 그대로 손바느질로 실을 다시 꿰맸어요. 뜯어낸 윗실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다시 썼으니 정말 감쪽 같았죠. 대부분 미싱으로 지글지글하게 다시 달아주던 시절이었는데 우리가 손바느질로 해주니 점점 소문이 날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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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수 사장의 손때 묻은 수선 도구들.

-88올림픽 후 운동화 유행으로 사람들이 구두를 점점 덜 신게 되면서 위기를 겪었다면서요.

(김) “맞아. 그땐 정말 다른 일을 하려고도 생각했어. 철근에 페인트를 입히는 도색 공장을 알아보기도 했지. 그런데 90년대 초반부터 구두 일은 끊겼지만 수입품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야. 외국에서 산 명품 가방을 가지고 와서 고쳐달라고도 하고, 수입업체에서 아예 수소문해서 직접 찾아오고. 그러면서 주 종목을 명품 수선으로 바꿨지.”

(오) “시대적으로도 잘 맞았어요. 수입자유화로 김영삼 정권(1993~98) 때부터 일감이 어마어마하게 늘기 시작했어요.”

-고객은 주로 어떤 사람들이었죠.

(김) “그때만해도 대기업 오너 사모님들이 많이 찾아왔어. 회장님 신발이랑 벨트를 많이 고쳤지. 배우·가수도 많았어. 엄앵란·선우용녀·박정수가 더 우리 단골이었지. 직접 물건을 가지고 왔다가 주차 딱지를 끊기도 했어. 참, 이득렬 전 MBC사장도 수선하러 직접 찾아 왔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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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사에서는 가죽제품을 수선할 때 실을 뜯어낸 바로 그 봉제 구멍 자리에 정확히 맞춰 손바느질을 한다. 70년대 명동사가 처음 이 수선법을 쓴 후로 지금은 보편화됐다.

-시대별로 수선을 맡기는 물건이나 브랜드가 달라졌겠네요.

(김) “70~80년대엔 구두가 대부분이었고, 고가품으로는 주로 악어백이랑 악어구두였어. 90년대에 해외 여행이 자율화되면서 외국에서 사가지고 온 수입 브랜드가 들어오기 시작했어. 구찌·발리가 많았지. 외국가면 다들 그 두 브랜드를 샀어. 다른 브랜드는 뭔지도 모를 때였으니까. 홍콩 12월 세일 때 가서 사와서 양품점에서 팔곤 할 때야. 수입자유화 후엔 루이비통·프라다가 많았고. 명품 회사들이 한국에 들어오면서부터는 그 회사에서 직접 수선을 맡기기 시작했어.”

-처음 찾아온 명품 브랜드는 뭐였나요.

(오) “란셀. 삼풍백화점 사장이 직접 수입한 거였는데 수입 브랜드로는 처음 우리에게 일을 맞겼죠. 입소문이 나니 그 다음에 버버리가 왔고, 그 다음엔 발리·구찌·페라가모·프라다에서 줄줄이 왔어요. 루이비통·겐조·에스까다와 아르마니 등 90년대에는 정말 안 하는 브랜드가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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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사의 가죽 창고. 여러 브랜드 제품 수선에 쓸 다양한 가죽을 쌓아놓았다. 김 회장과 오 사장은 수선에 들어갈 가죽을 구하려고 몇 년에 한번씩은 해외 가죽 페어에 나가 직접 사온다.

-수선 재료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김) “외국에 나가 가죽을 사오고, 원단을 구할 수 없을 땐 중고 가방을 사서 뜯어서 썼어. 30만~50만원짜리 중고 루이비통 가방을 사서 가방 하나를 고쳐주곤 10만~15만원을 받았어. 쓰고 남은 다른 가죽과 부품은 다른 가방 고칠 때 쓸 수 있으니까. 금은방에 가서 로고 금형을 떠서 찍어주기도 하고 부러진 부속은 직접 만들어 도금까지 해서 달았어. 지금은 그렇게 해주는 수선집이 많지만 그땐 우리밖에 없었어.”

-기억에 남는 수선을 꼽는다면요.

(김) “90년대 초반엔 찢어진 명품 백을 가지고 오는 여대생이 많았어. 이대생, 연대생이 많았는데 명품을 가지고 다니는 걸 시기한 누군가가 칼로 가방을 찢어서 고치러들 왔었지. 또 명품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던 때라 어이없는 싸움도 많이 했어. 한번은 버버리 백을 가지고 온 손님이 있었는데 수선 후 가방에 붙은 ‘메이드 인 이태리’ 라벨을 보고 자기 가방이 아니라는 거야. 버버리인데 왜 (영국이 아닌) 이탈리아냐며 자기 가방이 아니라고 했어. 당시에 30만원 정도 하는 가방이었는데 ‘당신 가방 아니면 내가 100만원을 주겠다’고 했는데 다시 오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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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사가 지금까지 취급해온 브랜드를 알리는 안내문. 에르메스 등 유명 브랜드 이름이 전부 보인다.

-명동사의 전성기는 언제였죠.

(오) “국내 명품시장의 흥망성쇠를 우리도 그대로 겪었어요. 97년 IMF를 기준으로 앞으로 5년, 뒤로 10년이 명동사가 가장 번영했던 시기예요. 그때 국내 경기는 죽었지만 오히려 명품은 잘 팔리던 때였어요. 2005년엔 백화점 안에 명동사 이름으로 수선실이 생기기 시작했고 지방에 지점도 냈죠. 백화점들이 마케팅 일환으로 우리 집을 입점시킨 거예요.”

(김) “한 켤레에 100만원하는 구두를 박스에 담아 50켤레 가져온 사람도 있었어. 한번도 안 신은 새 신에 고무창을 달아달라는 거였지.”

-맨 처음 들어간 백화점은 어디였나요.

(김) “2005년에 롯데백화점 애비뉴엘이 문을 열 때 들어갔어. 당시 명품 담당을 신격호 회장님 외손녀(장선윤, 당시 롯데쇼핑 이사)가 맡으면서 우리더러 들어오라 해서 갔지. 신세계 본점엔 2007년 들어갔고, 확장세를 이어서 같은 해 부산에도 2개 지점을 냈어. 하지만 솔직히 별로 좋은 기억은 아냐. 1년마다 계약 갱신하라면서 귀찮게 하더니 5년 지난 후 다 빼라고 하더라고. 결국 모든 백화점에서 철수했고 지금은 매장에서 수선 접수 받은 걸 우리한테 보내주는 형태로 바뀌었어.”

-브랜드에서는 의뢰받은 물건을 홍콩이나 유럽 본사에 보내 고친다고 하던데요.

(김) “물론 보내는 것도 있지만 한국에서 고치는 것도 많아. 90년대까지는 (외국으로 보내지 않고) 우리가 거의 다 했어. 홍콩에서 고친 거보다 우리가 한 게 더 낫거든. 시간도 적게 걸리고 비용도 경제적이지. 당시엔 명품수선이 하도 많이 들어와서 버버리 전담, 루이비통 전담 식으로 브랜드별 전담 수선공을 따로 뒀어. 지금은 시스템이 많이 달라져서 루이비통은 이젠 한국에서도 자체 수선실을 운영해. 그 외에 프라다·샤넬·카르티에 정도가 한국 지사에 수선실이 있는데 거기도 100% 다 하는 건 아니고 외주를 주기도 해.”

※명동사에서 7년간 루이비통을 전담한 오 사장은 2000년대 초 아예 루이비통 코리아에 입사했다. 루이비통 측이 한국에 수선실을 만들면서 스카웃한 것이었다. 그는 수선실을 세팅하는 등 2년 6개월을 루이비통에서 일하다 다시 명동사로 돌아왔다.

-왜 돌아왔나요.

(김) “오 사장이 루이비통 간지 2년쯤 됐을 때 내가 회사 앞으로 찾아가서 ‘같이 일하자’고 부탁했어. 강남점을 낼 때였는데 믿을만한 기술자가 필요했거든. 고맙게도 오사장이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고 강남점 공동 사장으로 일을 맡겼어. 우리 큰 아들하고 같이 말이야.”

(오) “거기(루이비통)가 편하긴 했지만 하루종일 기계처럼 일하는 게 영 재미가 없었어요. 직원이 둘 있었는데 하루종일 말 한마디도 안하고 일만 하는 생활이 지겹기도 했고.”

(김) “2014년 세월호 사건 이후로 타격이 엄청 커. 게다가 올 여름은 너무 더워서 사람들이 더 안 나왔어. 걱정이 많아. 하지만 잘 극복해낼 거야. 난 그냥 수선공이 아니라 스스로를 장인이라고 생각해. 앞으로도 그런 마음으로 명동사를 꾸려나갈거야. 그래야 후회하지 않지.”

글=윤경희 기자 annie@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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