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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재현’과 ‘재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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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1795년 정조는 창덕궁을 출발해 수원 화성으로 향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참배하기 위한 을묘원행이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과 정조 재위 20년을 맞아 최대 규모의 능행차였다. 지난 주말 당시 모습을 보여 주는 행사가 열렸다.

이를 두고 “이틀간의 정조 능행차 재현에 3000여 명과 말 370여 마리 동원” “‘원행을묘정리의궤’를 토대로 해 정조 능행차를 옛 모습 그대로 재연” 등 ‘재현’과 ‘재연’을 혼용하고 있다. 어떤 단어를 쓰는 게 적절할까? 당시 왕실 행렬을 원형대로 보여 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으므로 ‘재현’이란 말이 어울린다.

‘재현(再現)’은 다시 나타나는 것이나 다시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정조가 어머니께 미음 다반을 올리는 의식, 장안문 입성 전 갑옷으로 환복하는 모습도 ‘재현’이라고 볼 수 있다. ‘재연(再演)’은 한 번 했던 행위나 일을 되풀이함을 이른다. 능행차 행사 도중 관계자가 낙마한 일에 대해 “이런 아찔한 사태가 재연되지 않게 주의하겠다”고 말할 수 있다.

“삼국시대 마을을 재현해 놓은 박물관”처럼 모습·상황을 그대로 다시 보여 줄 때는 ‘재현’, “현장검증에 나선 피의자가 범행을 재연했다”와 같이 행위·일을 반복할 때는 ‘재연’을 사용하면 된다.

두 말 중 어느 것이 와도 무방할 때도 있다. “비행기 사고 당시를 재연하다”의 경우 사고 원인을 밝히고자 모의실험 등을 통해 조종사의 기기 조작 등을 되풀이해 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비행기 사고 당시를 재현하다”의 경우는 실제 사고 상황과 최대한 비슷하게 구현해 놓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은희 기자 e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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