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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한미약품 사태가 남긴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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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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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
경제부 기자

‘도대체 왜?’

한미약품 ‘늑장 공시’ 사태를 보면서 처음 든 생각이다. 전날 통보받은 계약 해지 사실을 9월 30일 오전 9시 29분에 공시했다. 특정 세력에게 팔 ‘29분’의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라면 수법이 너무 뻔하다. 은밀해도 시원치 않은 판에 전국민에게 ‘우리 주가조작 해요’라고 광고하는 격이라니…. 뭔가 사정이 있겠지 싶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판은 아니다. 자칫하면 그 뻔한 의혹이 사실로 입증될지도 모른다. 29분 늑장 공시는 우연일 수 있다. 그런데 그 시간 동안 그날 공매도 물량의 절반이 쏟아졌다. 금융당국이 조사에 나서자 ‘미공개 정보가 공시 전 유출됐다’고 주장하는 제보자가 나타났다.

한미약품의 미공개정보 유출 사건은 지난해 3월에도 일어났다. 주범은 한미약품의 20대 연구원이었다. 그는 7800억원 기술수출 계약이라는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주식에 투자, 일주일 새 8700만원의 부당이득을 취했다. 지난달 29일 선고된 항소심에서 징역 8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한미약품이라는 회사는 잘나가도 직원들 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2010년 임성기 회장이 ‘제2 창업’의 원년을 선언하면서 연구개발(R&D)에 돈을 쏟아부었다. 2010년 이후로만 1조원에 육박한다. 당장은 돈이 안 되는 신약 개발에 매진하면서 2010년엔 창업 후 처음으로 영업적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회사가 돈을 못 버니 임금은 동결됐다. 국민연금 데이터로 연봉을 추정하는 크레딧잡에 따르면 한미약품의 연봉은 올해 입사자는 3787만원, 평균은 5649만원이다. 같은 업계인 유한양행은 각각 4456만원, 7027만원이다.

반면 임 회장이 보유한 한미약품 지주사인 한미사이언스 주식 평가액은 지난해 3000억원에서 지난해 말엔 2조7000억원으로 불어났다. 올해 주식 배당금을 3억원 이상 받은 어린이(만 13세 이하) 8명 가운데, 7명이 임 회장의 손자·손녀다.

연초 임 회장이 사재를 털어 1인당 5000만원 수준의 성과금을 쐈지만 직원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을 수 있다. 일하는 만큼 보상이 충분하지 않으면 직원들은 다른 유혹에 빠지기 쉽다. 지난해 미공개 정보 유출 사건이 터졌다면 회사는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마련했어야 한다. 설사 이번 사건에 내부 직원이 연루되지 않았다고 해도 한미약품은 투자자 보호 의무를 다했다고 볼 수 없다. 기본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뛰어난 기술을 개발한들 누가 안심하고 한미약품에 투자를 하겠는가.

고란 경제부 기자 ne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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