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베테랑 영입 대신 ‘자체 발효’ … 빈자리는 키워서 채운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00호 25면

두산 베어스의 상징색인 흰색은 야간경기때 선명한 존재감을 드러내 준다. 잠실야구장에서 두산 팬들이 한재권 응원단장의 지휘에 맞춰 힘찬 응원전을 펼치고 있다. [사진 두산 베어스]

1982년 3월 27일,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넥타이 차림에 구두를 신고 동대문야구장 마운드에 올랐다. 그가 시구(始球)를 함으로써 대한민국 프로야구의 역사가 시작됐다.


원년 참가 팀은 6개(OB 베어스, 삼성 라이온즈, MBC 청룡, 해태 타이거즈, 롯데 자이언츠, 삼미 슈퍼스타즈) 였고, 우승은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가 차지했다.


프로야구가 35년의 연륜을 쌓았다. 공식 명칭도 KBO리그로 바뀌었다. KBO리그는 올해 800만 관중을 돌파하며 명실상부한 국민 스포츠로 자리를 굳혔다. 그동안 많은 팀들이 명멸했다. 원년 멤버 중 오너십과 팀 명칭이 그대로 유지되는 구단은 3개(두산·삼성·롯데)뿐이다. 롯데는 1992년 우승 이후 24년째 정상에 올라 보지 못했다. 삼성은 2011년부터 2014년까지 한국시리즈를 4년 연속 제패하며 ‘해가 지지 않는 삼성 왕조’를 구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난해 한국시리즈에서 두산에 1승4패로 왕좌를 내줬고, 올해는 10개 팀 중 5위 안에도 들지 못해 가을야구를 구경만 하는 신세가 됐다.


흐름은 돌고 돌아 원년 우승팀 베어스에게로 왔다. 두산은 지난해 한국시리즈 우승의 여세를 몰아 올해는 페넌트레이스를 압도적인 1위로 통과하며 한국시리즈에 선착했다. 2000년 현대 유니콘스가 세웠던 시즌 최다승(91승) 기록도 넘어섰다. KBO리그 최초로 시즌 15승 투수를 4명(니퍼트 21승, 보우덴 18승, 유희관·장원준 15승)이나 배출했다. 올해 15승 투수 6명 중 4명이 두산 소속이다. 국내에서 가장 넓은 잠실구장을 홈으로 쓰면서도 홈런 20개 이상을 친 선수가 5명(김재환·오재일·에반스·양의지·박건우)이나 된다. 성적이 좋으니 팬들이 몰리는 건 당연한 일. 2년 연속 홈 관중 1위, 8년 연속 100만 관중 돌파 기록도 세웠다. 한국 프로야구의 최고봉이 된 두산, 거기에는 무엇이 있을까.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가 지난해 4월 잠실 두산-롯데전에서 시구하고 있다. [중앙포토]

[깜짝 신인 계속 튀어나오는 ‘화수분 야구’]두산의 올 시즌 전망은 그리 밝지 않았다. ‘타격 머신’ 김현수(28·볼티모어 오리올스)가 미국 메이저리그로 진출했기 때문이다. 다른 팀에 비해 특별한 전력 보강도 없었다. 그러나 두산의 ‘화수분 야구’는 과학이었다. 김현수가 빠진 자리에서 김재환·박건우·오재일이 동시 폭발했다.


화수분 야구는 ‘끊임없이 뛰어난 선수들이 튀어나온다’는 뜻으로 두산 베어스를 상징하는 표현이다. 두산은 1983년 국내 구단 최초로 경기도 이천에 2군 훈련장을 마련했다. 당시만 해도 가장 앞서갔지만 지금은 10개 구단 모두 훌륭한 2군 육성 시스템과 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왜 두산에서만 유독 깜짝 놀랄 만한 선수들이 튀어나오는 것일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해답이 있었다.


지난 4일 잠실야구장에서 만난 두산 베어스 김승영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팀 선수들도 물론 열심히 하지요. 그런데 우리 선수들은 주전 한 명이 빠져나가면 ‘저 빈 자리는 반드시 내가 메운다’는 각오가 뚜렷해요. 그런 선례들을 워낙 많이 봐 왔기 때문이죠. 다른 팀은 비싼 돈을 주고 베테랑 선수를 영입하지만 우리는 나간 자리를 반드시 밑에서 올라와서 채운다는 공감대가 있어요. 그러니까 비주전 선수들도 늘 준비가 돼 있는 거죠.”


메이저리그를 거쳐 두산에서 투수로 뛰었던 김선우 해설위원의 해석은 더 구체적이다. “두산은 팀 케미(케미스트리의 줄임말. 조직의 화학적 결합을 뜻함)가 좋은 팀입니다. 주전 선수 대부분이 백업(후보) 출신으로 2군에서 찬밥 먹은 설움을 갖고 있죠. 지금의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압니다. 이런 간절함이 타석 한 번, 수비 하나도 초집중하게 만들죠. 방망이가 안 맞는 날은 수비라도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가 눈에 보여요.”


김 위원은 두산의 끈끈한 선후배 문화도 소개했다. “미국에서 돌아와 보니 선배를 선배로 대접하고, 후배를 후배로 인정하고 도와주는 분위기가 딱 잡혀 있었어요. 아무리 잘 나가는 후배라도 운동장에 일찍 나와서 심부름하고, 숙소에서 빨래를 나릅니다. 겉멋 들고 건방 떠는 친구가 없어요. 선배들도 2군에서 올라온 후배들이 잘 될 수 있도록 진심으로 격려하고 챙겨줍니다.”


두산의 잠실 라이벌인 LG 트윈스 출신 이병훈 해설위원의 말에도 핵심이 담겨 있다. “두산은 푹 곰삭은 발효식품 같은 팀입니다. 사람을 함부로 써먹고 버리지 않아요. 아무리 뛰어난 신인이 들어와도 2군에서 1∼2년은 썩힙니다. 육체적·정신적으로 단련시킨 뒤에야 1군으로 올리죠. 퓨처스리그(2군리그)에서 3할에 15홈런을 때린 타자도 ‘내가 다음 시즌에도 이 정도 성적을 내야 1군에 올라가겠구나’ 생각합니다.” 이 위원은 “경기 수가 많은 프로야구는 주전만큼이나 받쳐주는 선수가 중요하죠. 두산은 혹서기 주말 경기에 주전들을 돌아가며 쉬게 해 줄 정도로 자원이 넉넉합니다”라고 말했다.


[휠라 23년째 스폰서, 니퍼트 6년째 에이스]두산 베어스의 ‘묵은 장맛’은 선수단에만 있는 게 아니다. ‘프론트’라고 불리는 구단 직원들도 익을 대로 익었다. 21년 전인 1995년에 두산이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지금은 사라진 인천 도원구장에서 태평양을 꺾고 우승을 확정짓는 순간을 함께 한 직원이 8명이나 남아 있다. 김승영 사장은 당시 마케팅팀장이었고, 김태준 홍보팀장은 갓 입사한 막내였다. 김 팀장은 “구단의 역사와 함께 한 베테랑들이 요소요소에서 중심을 잡고 있어요. 그 동안 겪은 숱한 경험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빠른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해 줍니다”라고 귀띔했다.


두산은 한 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여긴다. 투수진의 기둥 니퍼트(35)는 6년째 두산 마운드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KBO리그에서 괜찮은 성적을 올린 뒤 일본으로 진출하거나 메이저리그로 돌아가려는 외국인 선수들과는 다르다. 니퍼트도 두산의 팀 문화를 편안하게 여기고 있다는 게 팀 관계자의 전언이다.


두산의 유니폼 스폰서는 1994년 이래 23년간 변함없이 휠라(FILA)다. 특별한 계약 위반이 없으면 한 번 맺은 신의를 지킨다. 김승영 사장은 “휠라가 스폰서를 맡은 94년에 두산이 꼴찌를 했어요. 그런데도 다음해 계약을 유지해 줬습니다. 우리가 우승을 했고, 그 다음부터는 계속 같이 갑니다”라고 설명했다.


두산에는 유난히 여성 팬이 많다. 선수 응원가 중에는 높은 음을 여성이, 낮은 음은 남성이 나눠서 부르는 게 있을 정도다. 구단은 일찍부터 ‘여성 팬의 잠재력’에 주목하고 레이디스 데이, 핑크색 유니폼 등 다양한 마케팅 활동을 해왔다.


3년째 두산 응원단상을 지키고 있는 한재권 응원단장은 “전체 팬 중 여성이 58%라고 합니다. 정수빈·박건우·민병헌 등 귀엽고 멋진 선수들이 야구도 잘하니 당연히 여성 팬이 많겠죠. 여성이 여성을 불러들이는 효과도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여성 팬이 많은 이유를 두산의 팀 컬러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두산의 메인 컬러는 흰색과 군청, 보조 컬러는 빨강이다. 흰색과 군청색은 깔끔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풍긴다. 반면 너무 심심하고 조용해 보이는 단점도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빨강색을 살짝 넣었다. 두산의 유니폼과 모자, 용품은 산뜻한 디자인으로 인기가 높다.


김승영 사장이 마케팅팀장 시절 얘기를 들려줬다. “야구장 응원에 막대풍선이 막 등장하던 시기였어요. 당시 단장님이 ‘밤에 잘 보이는 노랑색을 쓰자’고 하시기에 ‘안 됩니다. 흰색으로 가야 합니다’하고 우겼죠. 지금도 그게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흰색 막대풍선과 깃발은 밤에, 특히 관중이 많이 모이는 포스트시즌에 큰 위력을 발휘합니다. 어둠 속에서 흰색은 선명하면서도 군중의 규모를 크게 보이게 하거든요.”


두산 열성팬 중에는 유명인사도 많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와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가 대표적이다. 정 전 총리는 유격수 김재호 선수의 결혼식 주례를 맡았을 만큼 선수들과 친하다. 리퍼트 대사도 가장 좋아하는 선수로 오재원과 니퍼트를 꼽을 정도로 ‘두산 편향’이다.


물론 두산이 완전한 팀은 아니다. 단점도 많고, 문제를 일으켜 팀을 떠난 선수도 꽤 있다. 그럼에도 프로야구 35년 역사 속에서 뚜렷한 방향성과 철학을 가진 팀이 나타난다는 건 상서로운 징조다. 자기 색깔을 지닌 팀이 많아질수록 팬들의 선택권도 넓어지니까.


올해 한국시리즈가 싱겁게 끝날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지난해 준플레이오프(4경기)-플레이오프(5경기)를 치르고 만신창이가 돼 올라온 두산이 한국시리즈에서 기다리던 삼성을 4승1패로 압도할 거라고 누가 예상했나. 그래서 가을야구가 재밌는 거다.


정영재 스포츠선임기자jerry@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