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기 【고려사의 재발견】 : 요약(65)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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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년 1차 몽골군의 고려 침입 때 구주(龜州)성은 최대의 격전지였다. 이 전투의 고려군 지휘자는 서북면[평안도] 병마사 박서(朴犀)였다. 그는 한 달간 계속된 전투에서 몽골군의 구주성 점령을 저지해 영웅이 된다.

권금성(權金城:속초의 외설악 소재). 1353년 몽골군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몽골과의 30년 전쟁에서 최대의 인명 피해를 입은 해가 1254년(고종41)이다. 이 해 원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인원이 약 20만7000명이나 된다. 사망자는 더 많았다고 한다. 당시 고려 인구는 500만 명 안팎으로 추정된다. ? 원나라는 고려인 포로들을 통치하기 위해 1296년(충렬왕22) 심양에 고려군민총관부(高麗軍民總管府)를 설치한다. 당시 심양왕(瀋陽王)이란 책임자를 임명했는데, 고려 국왕과 같은 지위를 부여했다. 만주의 심양 지역에는 그만큼 고려인이 많이 거주했다.


고려 말 유학자 이곡(李穀:1298∼1351년)은 1341년 ‘절부조씨전(節婦曺氏傳)’(『가정집』 권1)이란 전기를 지었다. 그는 전쟁고아와 미망인인 조씨의 삶을 ‘곧게 살아온 여인[節婦]’이라고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이곡은 조씨의 집을 구입했는데, 조씨의 손녀사위가 자신과 같은 해 과거에 합격한 동년(同年)이라는 인연으로 이후 조씨와 자주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그녀의 기구한 삶을 기록할 수 있었다. 조씨의 삶 속에는 몽골과의 전쟁 이후 고려사회가 겪은 여러 전쟁의 흔적이 그대로 담겨있다. ? 1270년(원종11) 6월 고려 정부가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하기로 결정하자 이에 반발한 무신들이 반기를 든 삼별초의 난이 일어난다. 이때 6세인 조씨는 군인인 아버지 조자비(曺子丕)와 함께 삼별초군에 체포되어 삼별초군을 따라 진도로 남하한다. 남하 도중 아버지 조자비는 딸을 데리고 탈출하여 개경으로 귀환한다. 조자비는 다시 고려군에 편성되어 1271년(원종13) 겨울 삼별초군을 정벌하러 탐라(제주도)에 갔다가 전사한다. ? 아버지를 잃은 조씨는 13세 되던 해(1278년) 대위(隊尉:정9품) 벼슬의 군인 한보(韓甫)에게 출가했다. 조씨의 시아버지도 군인이었다. 결혼 3년 만인 1281년(충렬왕7) 여름 조씨의 시아버지는 몽골·고려 연합군의 2차 일본 원정에 참전했다가 전사한다. ? 1290년(충렬왕16) 12월 원나라 사람 내안(乃顔)이 만주에서 세조 쿠빌라이에 반란을 일으킨다. 내안의 휘하 장수 합단(哈丹)이 원나라 군사에 쫓겨 고려로 침입한다. 충렬왕이 강화도로 피란을 갈 정도로 상황은 위급했다. 원나라는 군사 1만3000을 보내 고려군과 함께 합단을 공격하여 이듬해 이들을 소탕한다. 조씨의 남편 한보는 1291년(충렬왕17) 여름 합단의 군대와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한다. 조씨가 27세 되던 해이다. ??


원나라는 고려 국왕 임명권을 장악해 내정을 간섭했다. 고려 국왕과 원나라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만 국왕이 되었다. 원에서 성장하고 교육을 받은 후 책봉된 국왕은 국내 정치 기반이 취약해, 원나라에서 자신을 보좌한 측근을 중심으로 정사를 펼쳤다. 국왕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측근들이 정치를 주도하는 형태의 궁중정치가 유행했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지배층이 권문세족(權門勢族)이다. 일본 원정과 내란 진압 등 전쟁을 통해 무공을 세운 사람, 원나라 말에 능통한 역관(譯官), 원나라 왕실의 환관(宦官)이나 공주 집안 사람 등 대체로 4가지 경로를 통해 진출한 인물들이 주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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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권의 수탈, 부곡인과 하층민의 봉기, 몽골과의 전쟁, 원나라와의 교류 등으로 고려 후기사회는 정치·경제·사회 분야에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부곡인은 그런 변화에 편승하여 계층 분화를 촉진시켰다. 계층 분화는 군현 승격 이후 부곡지역을 해체하는 현상으로 발전되었다.

김취려 묘.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소재. 14세기 원과의 관계가 호전되자 김취려는 사후 백 년 만에 재평가를 받는다. 조용철 기자

원나라 간섭기에 역사가 이제현(李齊賢·1287∼1367)은 ‘김공행군기’(金公行軍記:1325년)에서 김취려(金就礪·1172∼1234)를 높이 평가했다. 1218년 몽골군과 연합해 몽골과 형제 맹약을 체결한 주역 김취려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형제맹약과 몽골 전쟁을 직접 체험한 한 세기 전의 역사가 이규보(1168∼1241)의 생각은 이제현과 달랐다.

원 간섭기 역사학자 이제현의 표준영정

이규보는 시기심이 많고 잔인한 몽골과의 형제맹약을 ‘어쩔 수 없이 맺은 것’이라 했다.


1259년 쿠빌라이 집권기(1259∼1294), 최씨 정권 붕괴와 왕정 복고로 몽골과의 전쟁은 종식된다. 이로써 고려와 원나라(1260년 이후 몽골에서 원으로 국호 변경)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전개된다. 1273년 두 나라는 삼별초의 반란을 함께 진압한다. 1274년 충렬왕은 원나라 공주와 혼인하면서 고려는 부마국(駙馬國:사위 나라)이 된다. 두 나라가 함께 두 차례(1274·1281년) 일본을 정벌하면서 긴밀한 관계로 접어든다. 즉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천자-제후국 관계로 바뀐 것이다. 그 대신 고려는 왕조의 정통성을 유지하려 했다. 새로운 관계의 전개는 역사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고려는 거란족을 섬멸한 1218년(고종5)을 두 나라 관계가 시작된 원년으로 보았다. 원나라 무종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 “지금 천하에서 백성과 사직을 가지고 왕 노릇 하는 국가는 오직 삼한(三韓:고려)뿐이다. (삼한이) 선대(태조 칭기즈칸)에 귀부한 지 거의 백 년이 되었다. 아비가 땅을 일구었고, 자식이 기꺼이 다시 파종을 했다.”(『고려사』 권33 충선왕 2년(1310) 7월조) ? 1218년 형제맹약 이후 몽골제국의 천하에서 유일하게 고려는 백성과 사직을 유지한 국가라고 했다. 형제맹약은 두 나라가 천자-제후 관계를 맺어 고려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백 년간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14세기 초 두 나라 지배층이 공유한 역사 인식이었으며, 이후 두 나라 관계는 실제로 어느 때보다 돈독하게 유지되었다. 그럴 경우 형제맹약의 효력을 무력화시킨 1232년 이후 몽골과의 30년 전쟁은 의미 없는 역사가 된다. ??


충선왕(忠宣王:1308∼1313년 재위)은 1309년(충선왕1) 7월 죽은 부왕(父王)의 시호(諡號)를 원나라에 요청한다. 이때 부왕 외에 이미 시호를 받은 증조왕(曾祖王) 고종과 조왕(祖王) 원종의 시호까지 이례적으로 요청한다. 1310년(충선2) 7월 원나라는 부왕에게 충렬왕, 고종에게 충헌왕(忠憲王), 원종에게 충경왕(忠敬王)이라는 시호를 고려에 통보한다. 원나라는 고려를 제후국으로 여겨 이렇게 ‘왕’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덧붙여 원나라에 충성을 하라는 뜻에서 칭호에 ‘충(忠)’자까지 붙였다. 원나라의 고려 지배가 그만큼 철저하고 강했다는 증거이다. 국왕 시호를 원나라에 요청한 것은 한나라의 관례를 따른 것이라 했다. 즉 충선왕은 천자국 원나라에 대해 제후국으로서 국왕 시호를 요청한 것이다. 시호 요청은 두 나라를 각각 천자-제후국의 공식적인 관계로 받아들인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14세기 고려 왕조는 원나라와 수립된 새로운 관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를 위해 몽골과의 30년 전쟁에 대한 재서술 등 가까운 백 년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한 이른바 ‘고려판 현대사’인 당대사 연구를 활성화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한 역사 서술이 현재 전해오는 『고려사』 가운데 원 간섭기 역사 기술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이 책은 이제현의 역사서술을 상당 부분 반영한 것이다. 실제로 원 간섭기 역사는 고려와 원 관계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고 고려와 몽골의 전쟁에 관한 서술이 풍부하지 않다. 살아 있는 현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일이 과거의 다양한 역사를 오도 또는 말살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아직도 유효한 역사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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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기, 「고려사의 재발견」, 제350호 2013년 11월 24일, 제351호 2013년 12월 1일, 제352호 2013년 1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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