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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을 작품처럼 ··· 느껴라, 경험하라, 즐거워하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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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호 16면

1 ‘그녀의 관점’이라는 주제로 열린 에르메스 우먼스 행사는 세션을 11개로 나눠 이번 시즌의 여성 아이템을 한 자리에서 선보였다.

2 ‘광물학 발굴’이라는 세션에서는 가방·시계·보석을 보물상자 같은 공간에 전시해 놨다.

‘패션 행사’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게 패션쇼다. 봄·여름은 물론 가을·겨울, 크루즈·프리폴 컬렉션까지 일 년에 두 번 이상, 모델들의 정형화된 워킹에 맞춰 새로운 디자인과 제품이 등장한다. 관람객들은 불과 10분도 걸리지 않는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오감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패션 캘린더’에서 살짝 비껴난 이벤트가 지난달 8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렸다. 에르메스가 베이징 민생 미술관(Minsheng Art Museum)에 마련한 ‘우먼스 유니버스(Women’s Universe)’가 그것. 이미 올 3월 선보였던 2016 FW의 기성복 컬렉션은 물론 구두·골드 및 실버 주얼리·핸드백·스카프 등 이번 시즌 여성용 신상 아이템을 한 공간에 한꺼번에 펼쳐 놓은 자리였다. 말 그대로 토털 컬렉션인 셈인데, 흥미로운 점은 제품의 ‘리뷰’에 멈추지 않고 이를 춤·노래·공연·전시 등과 결합했다는 사실이다. 이를 위해 아티스틱 디렉터 발리 바레와 에르메스의 디자이너 나데주 바니 시뷸스키가 모든 의상과 전시품을 직접 선정했다.


이 다이내믹한 행사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단지 물건을 사지 마라. 브랜드 그 자체를 경험하라.’ 최근 패션 하우스들의 너나없는 목소리를 그대로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그 현장에 중앙SUNDAY S매거진이 다녀왔다.

3 루신다 차일즈가 안무를 구성한 창작 발레. 에르메스 2016 FW 컬렉션의 바이어스 컷 드레스에서 영감을 받아 구성됐다.

4 ‘힙노틱 스퀘어’ 세션에서는 10개의 실크 스카프와 이와 관련된 10개의 동영상을 짝지어 설치 작품으로 만들었다.

5 브랜드의 뿌리가 되는 말과 승마를 탐험하는 공간. 마구와 안장 뿐 아니라 그로인해 제작된 가방·보석·의상·시계 등을 선보였다.

컬렉션 드레스를 입은 무용수들의 발레 공연 지난달 8일 오후 7시. 행사장인 민생 미술관에 심한 교통체증을 뚫고 도착했을 때 주변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하지만 웬걸,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입구에서 손님을 맞는 건 제각각 다른 영상을 뽐내고 있는 11개의 동그란 모니터 설치물. 설명을 듣고 화면을 쳐다보니 행사의 ‘목차’나 다름없었다. ‘여성적 관점(The View From Her)’이라는 주제 아래 이 행사에서 선보일 11개의 세션을 하나하나 각각의 화면에 담아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모여있던 관람객 중 일부가 서둘러 자리를 떴다. 댄스 공연이 막 시작되려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포스트모던 안무가 루신다 차일즈(Lucinda Childs)가 구상한 무대로, 올 시즌 비대칭 컷 드레스의 패턴과 사선에서 영감을 받은 창작 발레였다. 브랜드 측이 이번 행사에서 가장 자랑거리로 내세운 공연이기도 했다.


불이 꺼지자 소박한 무대에 9명의 무용수가 에르메스의 드레스를 입고 하나둘씩 등장했다. 모직에 실크를 더한 드레스는 무용수들의 손짓과 발짓에 따라 함께 리듬을 탔다. 비대칭의 실루엣을 뚫고 나온 다리는 뻗을 때마다 그 곧음이 더욱 부각됐다. 기성복이 아닌, 마치 댄서들을 위한 무대의상인 양 어색함이 없었다.


압권은 라이브 공연에 비디오 영상이 겹쳐지는 순간. 무대 뒤로, 천장으로, 양 옆으로 똑같은 무용수들이 거울에 반사되듯 등장했다. 9명이 아니라 18명의, 27명의 가상의 군무가 변화무쌍하게 펼쳐졌다. 규모를 줄었다 늘었다를 반복하는 실제와 가상의 교차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마치 최면에 빠진 것처럼 몽환적이었다. 언젠가 차일즈의 안무에 대해 ‘선사적 발레(prehistoric ballet)’라 표현했던 무용 평론가 아르레네 크로체의 말이 다시금 연상되는 순간이었다. 드레스를 만든 시뷸스키 역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쇼 직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 역시 디자인을 할 때마다 여성의 해방, 혹은 자유를 고려한다”면서 “이 공연은 자유로운 영혼으로서의 여성을 보여줬다”고 평했다.


이번 행사에서 안무가 차일즈의 활약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무대 밖에 또 하나의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번에는 그가 관람객 앞에 직접 등장했다. ‘트윌레인 기법(Twillaine Techniques)’이라 칭한 세션에서 그는 에르메스 스카프의 작업 노하우를 단순화시켜 안무로 재해석했다. 커다란 테이블 위에 하얀 초크로 스카프의 밑그림 선을 긋고, 문진을 두는 등의 관습적인 동작들을 마치 노승이 도를 닦는 것처럼 흔들림 없이 이어갔다. ‘규칙적인 템포와 미니멀리스트’로 알려진 그의 시그너처 스타일을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6 메탈 스터드로 장식된 다양한 제품과 공간이 눈길을 끈 ‘우주 속의 스터드’ 세션. 어스름한 분위기와 극적인 대조를 이뤘다.

7 에르메스 가죽 가방을 해체시켜 보여준 전시품.

8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악어 가죽백은 신비로움을 자아냈다.

체크무늬로 감싼 자동차 시승에 스틱 게임도 1만㎡나 되는 행사장에 모인 700여 명 관람객을 단박에 사로잡는 이벤트는 또 있었다. 세 명의 여인이 스니커즈를 신고 행사장에서 암벽을 오른 것. 한쪽 계단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스니커즈들이 좀 식상하다 싶었는데, 반전이었다. 그들은 로프에 매달려 이 벽 저 벽을 옮겨다녔다. ‘수직(Vertical)’이라는 제목의 퍼포먼스는 다소곳하고 얌전한 여성성 대신 중력을 거스르는 일종의 도전으로 여성을 해석했다.


다이내믹한 볼거리를 뒤로 하고 들어간 몇몇 공간은 박물관이나 갤러리를 연상시켰다. 맨 먼저 발길이 닿은 ‘비밀 서랍장(Secret Drawers)’세션은 앞서 댄스 공연에서 봤던 아홉 벌의 드레스와 그에 어울리는 액세서리를 함께 전시해 놨다. 특이한 것은 옷걸이에 걸거나 마네킨에 입힌 것이 아니라 사각 전시함에 늘여 뜨려 놓았다는 점. 그래서 박물관에서 옛날 복식을 관람하는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다음 세션에서도 이 느낌은 그대로 이어졌다. 가방·시계·주얼리를 선보이는 공간이었는데, 유색 광물과 함께 유리 케이스에 담겨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모양새가 마치 발굴되기만을 기다리는 보석 같았다.

9 안무가 루신다 차일즈가 스카프 제작 과정을 정적인 퍼포먼스로 선보였다.

10 태터솔 체크 무늬가 새겨진 다양한 가방·의상·액세서리 등이 전시된 체험 공간. 차에서 사진을 찍거나 오토바이를 구경할 수 있다.

11 이번 전시를 미리 엿볼 수 있는 ‘비전 룸’ 세션. 에르메스 확대경 속에 각 세션의 이미지를 담았다.

차분함이 어느새 따분함으로 여겨질 때쯤, 주변 누군가가 “저쪽에 재밌는 게 있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따라 발길을 옮겨 보니 과연 분위기가 메인 행사장과는 전혀 반대였다. 경쾌하게 쿵쾅거리는 음악이 귀에 먼저 꽂혔고, 복고풍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보였다. ‘이게 에르메스와 무슨 상관?’이라는 의문도 잠시, 이번 시즌 주요 디자인 모티브가 된 태터솔(tattersall) 체크 무늬가 열쇠가 됐다. 차와 오토바이 래핑은 물론이고 그 주변으로 태터솔 체크가 새겨진 가방과 옷, 액세서리가 함께 놓여져 있었다. 사람들은 차나 오토바이를 타고 멋진 포즈를 취하며 인증샷을 찍어댔다. 다른 한쪽 켠에선 ‘레이스’가 벌어졌다. 실제 몇몇은 스틱을 잡고 속도를 내며 경주를 즐겼다. 경마와 관련된 사진, 경마장에서 영감을 받은 가방·스카프 등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이번 행사는 지난 몇 년 간 패션 하우스들이 추구하는 ‘재미와 경험’을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했다. 럭셔리를 단지 비싼 핸드백·시계·구두에 국한하지 않고 ‘신기하고 해볼 만한 체험’으로 이해하는 ‘밀레니얼 세대(1980년 이후 태어난 이들)’를 공략한 것. 그러면서도 늘 제품을 예술 작품처럼 선보이려는 브랜드 본연의 색깔을 유지했다. 아니나다를까, 그 행사 면면은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등으로 곧바로 퍼져나가는 파급력을 보여줬다. 딱 밀레니얼 세대의 방식으로 말이다. ●


베이징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에르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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