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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시대로 옮긴 토스카, 21세기 관객에게 울림 줄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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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호 24면

1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는 ‘토스카’ 무대세팅이 한창이었다.

2 13일부터 공연되는 시즌 개막작 ‘토스카’

올 상반기 국립오페라단의 선택은 푸치니나 베르디가 아니었다. 그 이름도 낯선 ‘루살카’와 ‘오를란도 핀토 파쵸’라는 신작 2편은 교향곡으로 익숙하지만 오페라를 작곡한 줄도 몰랐던 드보르작과 비발디의 오페라였다. 가뜩이나 오페라는 어렵고 지루하다는 인식이 만연한 한국에서, 본고장 유럽에서도 잘 공연되지 않는 ‘듣도 보도 못한’ 레퍼토리가 왠말일까.


뚜껑을 열어보니 반전이었다. 토종 프로덕션으로 초연한 ‘루살카’는 누구나 아는 인어공주 이야기에 아름다운 아리아가 일품이었고, 공들인 무대 연출은 볼거리도 충실했다. 바로크 오페라 ‘오를란도 핀토 파쵸’는 무려 7각 관계가 얽히고설킨 막장 드라마. 꼬리에 꼬리를 무는 난리법석 소동극이 유쾌하고 친근하게 다가왔다. 카운터테너가 2명이나 등장하는 고난도 기교와 마술과 환상의 시대를 표현한 화려한 무대도 인상적이었다.


이 두 작품은 지난해 7월 취임한 김학민(54) 국립오페라단 예술감독이 시즌제 도입과 함께 처음 제작한 신작들이라 관심이 집중됐다. 완성도에 대한 의견은 갈리지만, 실험성과 대중성을 함께 가져가겠다는 비전만큼은 확실히 보여준 셈이다. 두 번째 시즌엔 어떤 작품들로 그 비전을 구현해 갈까. 2016-17 시즌 첫발을 떼는 ‘토스카’(10월 13~16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공연을 앞두고 그를 만났다.

3 지난 시즌 화제를 모았던 바로크 오페라 ‘오를란도 핀토 파쵸

4 김 예술감독이 직접 연출한 ‘루살카’

김학민 예술감독 집무실엔 책상이 두 개 있었다. 각종 서류들로 빈틈없이 뒤덮인 앤틱풍 책상 옆으로 평상처럼 널찍한 컴퓨터 책상에는 디자이너들이 쓸 법한 대형 모니터와 노트북 컴퓨터가 따로 있었다. 전부 대학 연구실에서 옮겨온 물건들이다. 대형 모니터에는 내년 4월 초연할 러시아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관련 논문이 떠 있고, 노트북으론 DVD 검토를 동시에 하느라 분주한 풍경이었다.


“시험이 내일인데 공부를 다 못한 느낌이랄까요? 1년 내내 계획 짜고 공연 올리느라 발을 동동 구르며 지냈네요. 직원들 모두 12월까지 주말도 반납한 상태입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국립오페라단에서 파란만장한 한 해를 보냈지만, 그는 예상 외로 평온해 보였다. 새 시즌을 앞두고 세월 가는 것도 잊은 채 시즌 운영과 작품 제작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지난 1년간 주력한 일도 전시성 성과를 내기보다는 지속가능한 시스템 구축이었다. 업무 매뉴얼 DB화 등 직원들이 일관성 있게 일할 수 있는 행정의 기본 틀 마련을 “가장 잘한 일”이라 자평했다.


제작 시스템 면에서도 조금씩 변화를 꾀했다. 외국 창작진에게 전권을 일임하던 관행을 탈피해 탄탄한 협업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연출과 예술감독이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합을 맞추고 무대와 조명 등 국내 창작진을 적극 기용했던 ‘오를란도 핀토 파쵸’는 협업의 이상적인 모델케이스라 할 만했다.


“처음부터 해외 네트워킹이 중요하다 생각했어요. 외국 스태프들과 공적·사적 투트랙으로 컨택한 덕에 가장 좋은 장점들을 끌어낼 수 있었죠. 의상 컬러와 텍스쳐 하나까지 서로 협의 하에 합을 맞췄는데, 행정을 넘어 예술감독으로서 방향성을 제시한 겁니다. 그런 방향성으로 국립오페라단의 아이덴티티가 확립됐으면 하는 바램이에요. 김학민이 기획해서 국립오페라단과 만들면 이런 칼라가 나오는구나 하는 한 예시가 됐달까요.”


생소한 레퍼토리와 예술감독의 직접 연출(‘루살카’) 등을 두고 지나친 개인 취향 노선 아니냐는 비판도 받았다. 하지만 작품 선정 기준은 결코 개인적이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변화를 해야 발전이 있고, 변화에는 위험과 고통이 따르죠. 오페라 발전을 위해 욕먹을 걸 감수한 선택이었지만, 그렇다고 생소한 작품만 우선하는 건 아니에요. 그 사이에 지방에서는 베르디·푸치니도 같이 해왔거든요. 관객 제쳐두고 못 보던 작품만 가져와 잘난 척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그는 취임 당초부터 ‘1/3 배분’의 원칙을 정했다. 베르디·푸치니처럼 대중적인 작품과 난해해도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 그리고 베르디·푸치니처럼 될 잠재력을 가진 작품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다는 얘기다. 이번 시즌의 경우도 ‘토스카’는 첫 번째, ‘로엔그린’은 두 번째, ‘로미오와 줄리엣’은 세 번째 케이스이고, ‘팔리아치·외투’는 첫 번째와 세 번째의 조합에 해당한다. 유일한 국내 초연작으로 주목받고 있는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에 대해선 “두 번째가 될지 세 번째가 될지 모르지만 가장 러시아적인 예술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했다.


“왜 차이콥스키가 아니라 무소르그스키냐고 묻는데, 러시아 민족주의 오페라의 최고봉이거든요. 러시아 오페라는 민족주의 오페라부터 소개해야 한다는 게 음악사적 입장이에요. 차이콥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이 가장 유명하긴 하지만 가장 러시아적이지는 않죠. ‘보리스’는 러시아 제정기 민중의 삶과 고통을 노래한 정서와 합창, 대륙의 느낌이 엑기스로 모아져 있어요. 크렘린궁의 시계종 소리까지 오케스트라로 표현했죠. 그런 음악적인 러시아성을 소개하고 싶은 겁니다.”

김학민 국립오페라단 예술감독 고려대 영문과를 거쳐 서울대 대학원에서 음악이론을, 미국 텍사스 오스틴 주립대에서 오페라 연출을 전공했다. 오페라 ‘코지 판 투테’ ‘피가로의 결혼’ ‘파우스트’ ‘오르페오’ 등을 연출했고, 베스트셀러 ‘오페라 읽어주는 남자’ ‘오페라의 이해’ 등을 저술했다. 경희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 2015년 7월부터 국립오페라단을 이끌고 있다.

“대중의 취향 있는 삶에 오페라가 기여할 것” 사실 지난 1년간 국립오페라단의 시스템 상 가장 큰 변화는 레퍼토리 시즌제 도입이었다. 그동안 유지되던 회계연도별 기획 체제를 글로벌 스탠더드인 ‘9월~이듬해 6월까지’로 전격 전환한 것이다. “한국도 레퍼토리 시즌이 정착 초기단계인데, 거기 동참한 거죠. 예산이 연초에 확정되니 가을부터 시작하는 시즌제와 충돌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외국도 상황은 똑같아요. 1년 전에 계획을 미리 세우면 되는거죠. 그래서 우리도 2019년도 계획까지 세우는 중입니다. 결국 시스템 구동을 얼마나 체계적으로 하느냐의 문제인데, 제대로 한번 해보려고 해요.”


레퍼토리 시스템 정착을 위해 지방 공연에서도 “계속 팔릴 만한 작품”으로 만들었다는 ‘토스카’는 푸치니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지만, 국립오페라단 프로덕션으로는 12년 만에 선보이게 됐다. 지휘의 거장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아들로 유명한 다니엘레 아바도 연출이 1930년대 파시즘 시대로 배경을 옮겨와 전혀 새로운 미장센으로 승부한다. “여태 보던 것과는 다른 걸 보여주려고 해요. 오페라가 옛날 것만 우려먹는다고 ‘슬레이비쉬 레퍼티션(slavish repetition)’이란 말도 하지만, 같은 ‘토스카’라도 21세기 서울의 청중에게 의미있는 작품으로 업데이트하고 싶었죠.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현대를 사는 토스카로 음미되었으면 합니다.”


오페라 연출가 출신이지만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한국 초연을 연출하기도 했던 그는 “진짜 좋은 오페라는 뮤지컬보다 더 재미있다”면서 “그런 좋은 오페라를 접하기 쉽지 않아서 모를 뿐이고, 그래서 우리의 사명감이 무겁다”고 했다.


“‘쉽지만 심오한’이라는 모순된 표현이 오페라에는 딱 맞아요. 이야기가 쉬워야 음악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플롯이 단순하지만, 그 안에 깊은 내포가 있어야 하거든요. ‘멋을 안다’고 할까요, 이제 우리 대중도 ‘취향’이란 걸 갖게 됐는데 좋은 오페라 안에 그런 취향에 기여할 수 있는 게 많다고 생각해요. 결국 삶의 행복으로 이어지게 되겠죠.”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국립오페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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