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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교육·평등·정보화가 만든 여성 리더 전성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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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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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한 달 남짓 남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당선된다면, 230년 미국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된다. 또 다음달께 새 사무총장의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이는 유엔 역시 그 어느 때보다 여성 사무총장 배출 가능성이 크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 영국의 메이 총리가 이미 세계 정치의 주역으로 등장해 있는 상황에서, 미국과 유엔에서도 여성 지도자가 배출된다면 세계 정치는 말 그대로 여성이 주도하게 된다.

독일 등 17개국 대통령·총리 활약
미국·유엔 수장도 여성 될 가능성
이념·계층에 따라 정치색은 달라
민주적 다양성 높이는 역할 기대

 1960년 스리랑카에서 세계 최초의 여성 총리가 선출된 이후 인도의 간디 총리, 이스라엘의 마이어 총리 등 4명의 총리가 60년대에 배출되었다. 70년대에는 최초의 여성 대통령 마리아 페론과 영국의 대처 총리 등 7명, 80년대에는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 등 9명의 여성 최고지도자가 활동했다. 그러나 90년대에는 25명으로 급증했고, 지금 현재는 11명의 여성 대통령과 6명의 여성 총리가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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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구의 절반이 여성임을 생각하면 결코 많은 수라고 하기 어렵지만, 여성의 보통선거권 도입이 남성에 비해 50년에서 100년 이상 늦어진 나라들이 부지기수임을 감안하면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는 성과다. 여성정치 도약의 근본적인 이유는 여성의 교육수준 상승에서 찾을 수 있다. 교육은 성공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데 영향을 주는 가장 중요한 변수인데, 유엔 189개 회원국의 고등교육 이수자 중 여성의 비율은 평균 50%다. 더 이상 여성이 교육에서 차별받지 않는다는 의미다. 나아가 G10 국가의 고등교육 이수자 중 여성의 비율은 평균 53.9%로, 선진국으로 갈수록 여성이 더 앞서 나갈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는 여성의 사회 진출과 정치 진출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1995년만 해도 미국 500대 기업에서 여성 CEO를 찾기는 힘들었으나 이제 전체의 24%가 여성 CEO다. 여성의 사회 진출 증가는 여성 정치를 위한 인적·물적 공급을 늘릴 뿐 아니라 성 인지적 관점의 정책을 만들어줄 여성 대표에 대한 수요를 늘리게 된다. 그 결과 여성 의원의 비율은 45년 2.2%에 지나지 않던 것이 현재는 22.9%로 상승했다. 여성 의원의 증가는 리더십 훈련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여성 최고지도자 등장의 확률을 높인다.

 셋째는 여성의 리더십이 정보화 시대와 친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여성이 수평적이고 참여적이며 긍정적 보상으로 설득하는 변혁적 리더십 스타일을 보이는 경향이 있는 데 반해, 남성은 위에서 아래로의 명령과 통제, 위협을 함으로써 설득하는 리더십 스타일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여성의 변혁적 리더십 스타일이 수평적인 네트워크 사회와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거대한 군중 동원과 사자후를 토하던 전통적인 선거운동 방식에서 시청자들과 조근조근 대화하는 미디어 선거운동 방식으로 변화한 것도 여성 정치지도자들의 성장에 도움이 되고 있다.

 먼저 대통령이나 총리를 지낸 여성 지도자들은 크게 가문의 힘으로 당선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아시아의 간디·부토·메가와티 등은 영웅적 아버지의 딸이고, 남미의 페론·차모로 등은 아내다. 영웅적 정치인의 죽음 뒤 아들이나 남동생이 아니라 딸이나 아내가 선택된 것은 여성이 통합의 상징성이 크고 권력을 독점할 가능성이 작을 것이라고 당시의 정치인들이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여성 지도자들은 개인적인 준비가 안 돼 있는 경우가 많았을 뿐 아니라, 정치 상황의 복잡성으로 인해 별다른 정치적 업적을 남기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또 여성의 지위와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도 나눌 수 있는데, 영국의 대처나 이스라엘의 마이어 총리는 남성적인 리더십 스타일로 여성의 권익 향상에 별 관심이 없었다. 반면 노르웨이의 브룬틀란 총리, 칠레의 바첼레트 대통령은 여성 권익 향상에 적극적이었다.

 가장 성공한 여성 정치인으로는 대처 총리와 메르켈 총리를 꼽을 수 있지만, 이들은 모두 3선의 성공한 우파 정치인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공통점은 거의 없다. 대처는 강력한 민영화, 노동조합에 대한 규제, 독자적 핵 억지력 확보와 같은 강한 우파 정책을 취했던 것에 반해, 메르켈은 보수당인 기민당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대연정을 통해 근로시간 축소, 최저임금 인상, 포용적 이민정책과 같은 온건한 정책을 취하고 있다.

 결국 남성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여성 정치인도 성별뿐만 아니라 이념, 출신 계층 등 다양한 요소에 의해 리더십이 만들어진다. 또 여성 정치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론 정치적 성공과 실패, 혹은 여성 권익 향상 여부를 예단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회계약론적 전제를 실현해야 한다는 규범론적 관점에서, 그리고 다양성이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높인다는 기능론적 관점에서 더 많은 여성 최고정치지도자들의 등장을 기대해 본다.

김민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