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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내 친구의 경계는 어디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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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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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
사회2부 부데스크

“친구하고 그러는 거 아니다. 이번엔 네가 내고, 다음엔 친구가 내면 되지 않나. 형편 어려운 친구에겐 계속 사줘도 된다. 햄버거나 샌드위치처럼 비싸지 않은 것 먹으면 된다. 그런 데 쓸 용돈은 준다.” 프랑스·영국 파견 근무 때 아들이 중·고교를 거쳤다. 친구끼리 모여 놀 때 밥값을 각자 낸다는 얘기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나도 그렇게 배웠다. 그게 상식이었다. 외국에서도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다.

스승의 날(영국에선 10월 5일) 직전에는 비싸지 않은 선물과 카드를 준비하라고 채근했다. “영국 친구들은 그런 거 안 한다”고 하면 “고마움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고 꾸짖었다.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검은 머리 외국인’이 될까봐 물러서지 않았다. 우리의 좋은 풍습이 몸에 익도록 해야 한다고 믿었다.

서양에 4년을 살면서 ‘더치페이’를 한 번도 안 해 봤다. 서구인들이라고 해서 늘 각자 내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팀 소속이라 매일 같이 식사하는 사이에, 미리 회비를 걷지 않은 단체 모임 정도에나 그렇다. 친구·지인끼리는 주로 돌아가며 낸다. 직무 연관성이 있는 공식 미팅에서는 십중팔구 보자고 한 쪽이 낸다. 더치페이라는 말은 원래 ‘네덜란드 짠돌이들의 지불 방식’을 조롱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영국 펍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각자 마실 술을 사 오면 그들은 영국인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현지인들은 보통 한 사람이 함께 온 사람들에게 각자 원하는 것을 물어본 뒤 자기 돈을 내고 술을 받아 온다. 술잔들이 비어 갈 때쯤 다른 사람이 일어나 앞의 일을 반복한다. 이를 ‘한 라운드’라고 부른다. 대략 그렇게 한 테이블에 앉은 사람 수만큼의 라운드가 진행된다. 주량이 적어 한두 잔밖에 못 마시는 사람도 라운드에 동참한다. 그러다 보니 한 잔 마시고 대여섯 잔 값을 치르는 일이 생긴다. 그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N분의 1’일 수 있다. 이 같은 불공정 상황에 대해 펍을 사랑하는 영국인은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마신 만큼 내는 게 공평한가, 즐긴(또는 취한) 만큼 내는 게 공평한가.”

아들에겐 재교육이 필요하다. ‘명백한 친구’가 아닌 경우에는 각자 내기를 하는 습성을 지금부터 기르라고, 스승의 날에는 꼭 빈손으로 학교에 가야 한다고 가르쳐야 한다. 친구의 기준을 물으면 “‘야, 인마’나 ‘이 자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이면 친구다”고 답을 해줄 생각이다. 나 스스로에게 적용할 기준이기도 하다.

이상언 사회2부 부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