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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박카스 아줌마가 딱 내 배역? 이젠 그런 말 안 믿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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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연애하고 갈래요? 잘해드릴게.” 길 위의 여자가 낯선 남자에게 다가가 말한다. 여자도, 남자도 완연한 노년이다. 여자는 일명 ‘박카스 아줌마’. 노인 상대의 성매매 여성이다. ‘죽여주는 여자’(6일 개봉, 이재용 감독)의 소영(윤여정). 손님들 사이에 ‘죽여주게 잘하는’ 여자로 입소문이 난 그는 뜻하지 않은 기회에 진짜로 사람을 죽여주는 여자가 된다. 노인 성매매 문제를 고발하는가 싶던 영화는 점차 외연을 넓혀 혼혈아와 트랜스젠더 같은 소수자 문제, 노년의 죽음과 존엄사 등을 아우른다. 올해로 데뷔 50주년인 윤여정(69)은 이 영화로 제20회 몬트리올판타지아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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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화녀’로 스크린에 처음 등장했던 윤여정은 당시 인형 같은 외모의 ‘트로이카 3인방’과 달리 이색적인 존재감을 드러낸 배우였다. [정경애(STUDIO 706)]

딱 ‘윤여정 아니면 안될 배역’같다.
“감독이나 작가들이 캐스팅할 때 그런 말을 많이 하는데, 젊을 땐 대체로 그 말을 믿었다. 그런데 난 이제 그렇게 자만할 나이는 아니다. 타이밍 맞아서 내가 하면 내 역할이고, 내가 못 하면 다른 배우만의 캐릭터가 되는 거다. 그게 배우의 운명이다. 늙은 배우는 나 말고도 많다.(웃음).”
도덕적으로도 비난받을 수 있는 상황이지만 소영에게 공감된다.
“이 시나리오를 수락한 이유다. 이재용 감독이 극단적으로 그리지 않고 따뜻하게 그려줄 것으로 믿었다. 소영은 아이를 입양 보내고 성매매를 시작한 순간에, 이미 자기는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그런 여자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죽여줄 수 있었을 거다. 자기가 못 죽고 살아남은 세월이 너무나 끔찍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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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이재용 감독의 영화 ‘죽여주는 여자’. [정경애(STUDIO 706)]

연기하기에 어려움은 없었는지.
“이 역할이 유독 힘든 장면이 많다. 늙은 배우가 소화하기엔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들고. 내가 비위가 좀 약해서, 여관방 특유의 냄새를 참지 못하기도 했고. 그런데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나는 영화 찍는 걸로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실제로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어떨까, 그 할머니들은 또 어쩌다 그런 상황에 내몰렸을까, 인생은 애초에 불공평한 거…”
그게 응축된 대사가 ‘남의 사정은 모르는 것’ 아닐까.
“맞다. 우리는 너무 쉽게 ‘다른 일 하지 왜 저런 일을 해’라고 얘기해버리곤 하는데, 진짜 남의 사정은 모르는 거다. 진짜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건가, 우리가 너무 오래 사는 게 문제인가, 여러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제는 어떻게 하면 잘살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잘 죽을까를 얘기할 시대다. 이 영화가 그런 문제를 잘 건드려줬다고 본다.”
노년과 죽음을 다룬 TV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도 출연했다. 노년에 대한 대중문화의 시선 변화라, 반가웠다.
“우리 어머니가 올해로 93세인데, 그 드라마를 굉장히 싫어하셨다. 젊은 사람들은 먼 얘기니까 그 이야기를 ‘구경’하며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거다. 죽음에 당면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 한다. 배우로서야 이런 주제를 다룬 작품을 할 수 있는 게 좋지만 말이다.“
도회적인 속물(‘돈의 맛’), 무지랭이 할머니(‘계춘할망’)까지 전혀 다른 역할을 이질감 없이 오간다.
“김기영 감독하고 ‘화녀’할 때 계약 조건 중 하나가 두 달 동안 하루에 하나씩 영화를 보는 거였다. 그때 수많은 영화를 봤는데, 김 감독이 나더러 ‘미스 윤은 꼭 알렉 기네스 같은 배우가 돼야 해’라고 했다. 그때는 알랭 들롱 같은 멋있는 배우 놔두고 왜 그런 배우가 되라는 건지 콧방귀만 꼈는데, 철이 안 든 거다. 내가 마흔 넘어서 ‘인도로 가는 길’을 보는데, 분명 알렉 기네스가 나온 댔는데 한참을 봐도 안 나오는 거다. 인도 사람으로 분장을 해서 내가 몰라봤던 거다. 아, 저렇게 하라는 거였구나. 그때 김 감독의 말을 이해한 것 같다.”
이재용·임상수·홍상수 감독, 김수현·노희경 작가 등 믿고 함께 작업하는 동료들이 있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좋다. 내가 워쇼스키 자매랑 넷플릭스 드라마 ‘센스 8’을 찍은 것도 한국 캐스팅 디렉터가 나를 섭외하려고 너무 열심이었기 때문이었다. ‘죄수 A,B,C 중에 하나 하라는 거 아니냐’고 거절했는데 ‘한국에도 선생님 같은 배우가 있다는 걸 꼭 알리고 싶다’며 어찌나 애를 쓰는지 거기에 넘어갔다. 내가 예순 되던 해에 결심한 게 있다. 이제는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들하고만 일하리라.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사치스럽게 나의 커리어를 마감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생각은 변함없다.“

66년 TBC 공채 3기로 데뷔한 윤여정은 김기영 감독의 ‘화녀’(1971)와 ‘충녀’(1972)에 잇따라 출연하면서 당시 충무로 여배우로는 가장 이색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독특한 음색과 마른 외모, 자의식 강한 캐릭터를 연기해 ‘걸크러시’의 선구자 같은 존재다. 2012년 ‘돈의 맛’(임상수 감독)에서는 아들뻘 김강우와 파격적인 베드신을 선보이기도 했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 6일 개봉
성매매하다 안락사 시켜주는 역
몬트리올판타지아영화제 여주연상
“지금은 어떻게 하면 잘 살까보다
어떻게 잘 죽을까를 얘기할 시대”

영화평론가 김형석은 “‘바람난 가족’ 이후 윤여정이 영화에서 맡은 역할들은 과감하고 용기있는 선택”이라며 “‘죽여주는 여자’는 그 정점에 있는 작품으로, 그녀가 아니라면 누가 이토록 위험한 섹슈얼리티와 휴머니티를 동시에 지닌 여성이 될 수 있을까”라고 촌평했다.

이은선 기자 har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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