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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문명과 홍해·인도양 잇는 ‘지중해의 窓’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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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9호 15면

이집트 문명은 오로지 나일강만이 중심일까. 이러한 의문점을 가지고 나일 강변의 룩소르 공항에 내렸다. 문명탐사의 정도는 없다. 해당 문명을 구성하는 ‘숲과 나무’를 두루 봐야 한다. 동쪽 시나이 반도와 홍해, 북쪽의 지중해, 남쪽의 수단 등 전체를 봐야 제대로 보일 것이다. 오로지 나일강을 중심으로 이집트 문명사를 논해 온 것도 일종의 편향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왕조 유적이 널린 룩소르 북방 62㎞, 강이 휘어져 북상하고 서부 사막에서 달려온 도로가 홍해로 뻗어나가는 교차로에 케나(Qena)가 있다. 홍해의 큰 도시 사파가(Safaga)와 후르가다(Hurghada) 항구로 연결되는 교통거점이다. 케나는 홍해 거점 알쿠사이르(Al-Quseir)와도 연결된다. 오스만제국 시대에도 쿠사이르는 아라비아 메카 하지(Haji) 순례단이 오가는 길목으로 여러 도시의 흥망성쇠가 거듭된 나일 밸리와 홍해를 이어주는 무역 중심이었다. 이집트 왕조 몰락 이후에도 오스만제국이 16세기에 다시 성채를 축성했을 정도로 중요했다. 영국은 프랑스를 쳐 이곳을 지배했다. 한동안 인도에서 뱃길로 출발한 향료가 쿠사이르를 거쳐 나일강을 따라 북상하고 다시 영국으로 건너갔다. 1869년 수에즈운하 개통으로 홍해-지중해가 직결되면서 중세적 무역로는 끝났다.


룩소르에서 나일강을 따라 남쪽으로 탐사했다. 왕조 말기인 프톨레마이오스 시절에 만든 크눔(Khnum) 신전이 있는 에스나(Esna)에는 몰락한 시장이 있다. 골목에서는 여전히 양복쟁이가 재봉틀을 돌리고 기름가게에서 수백 년 된 육중한 기계로 기름을 짜고 있었다. 오스만 시대의 카라반(대상·隊商) 건물은 한때 수단·소말리아·중앙아프리카에서 온 상인이 머물던 곳이다. 소말리아가 동북아프리카의 인도양 창구였음을 고려한다면 이집트는 홍해와 인도양을 통해 인도 등과 이어졌다.


에스나에서 조금 남하하니 콤옴보(Kom Ombo)가 나온다. 평지에 아스팔트를 깔아 나일강을 따라 시원스럽게 질주할 수 있다. 콤옴보는 고대 이집트의 군사적 전략거점이자 이집트인과 누비아인 사이의 무역거점. 좀 더 남하하니 아스완이 나온다. 아스완 엘레판티네 섬은 이곳이 수단에서 넘어온 아프리카 코끼리 교역거점이었음을 알려준다. 코끼리가 왜 필요했겠나.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지중해 동쪽 안티오크(현 안타키아)에서 영역을 확장해 오던 오랜 라이벌 셀루시드(Seleucid)의 인도 코끼리 부대를 제압하기 위해 수단 코끼리가 필요했다.


나일강 힘 의지하면서 지중해 시대 열어이집트 마지막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그 후계자의 힘으로 세워졌으나 이집트 전통을 수용하면서 통치술을 발휘했다. 나일강의 힘에 의지하면서도 본격적으로 지중해 시대의 개막을 알린 것.


지중해를 보고 있는 알렉산드리아에선 그리스인이 운영하는 호텔에 묵었다. 매니저는 “그리스 사람들은 여전히 이 도시를 우리네 도시라고 친근하게 생각한다”며 자긍심을 갖고 말했다. 그리고 “그리스 말이 여전히 잘 통하는 도시지요”라고 덧붙였다. 모든 건축물과 동상 등은 어김없이 북쪽 지중해를 향한다. 룩소르·카이로에서 오로지 강을 향하다가 바다로 고정되는 것이다. 그만큼 도시의 ‘결’이 ‘해양적’이다.


100여㎞ 떨어진 나일강 하구부터 찾았다. 나일강이 지중해와 만나는 하구의 촌락 로제타다. 1799년 나폴레옹의 원정군이 로제타석을 발견함으로써 미궁이던 이집트 문명 해독의 열쇠가 열린 바로 그곳이다. 이집트 상형문자와 민중문자, 그리스문자가 병렬로 새겨졌다. 3개 언어로 비석을 만들어야 했을 정도로 다중 언어가 이 지역에서 요구됐다. 번역 수요는 그만큼 이 일대가 그리스인이 토착민 세계와 접촉하는 장소였음을 뜻한다.


수에즈운하 개통 이전, 나일강을 따라 들어온 물산이 로제타에서 지중해로 나가고 반대로 지중해에서 나일강을 거슬러 남쪽으로 누비아인이 사는 수단까지 내려갔다. 로제타에는 지금도 전통 선박 조선소가 남아 있을 정도로 해운업이 활발했다.


이집트 문명에는 파피루스 배부터 목조 배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증거물이 있다. 기자 피라미드 지하로부터 고분벽화에 이르기까지 선박 건조와 항해기술이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프톨레마이오스 시절에 지중해 문명과 본격 조우하면서 이같이 오래 누적된 선박기술이 잘 접목됐을 것이다.

1 파로스 등대가 있던 로도스섬의 등대터에 성이 들 어섰다.

2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있던 자리의 새 도서관. [사진 주강현]

헬레니즘 문명권과 오랜 내연 관계시내에는 오랜 유대교당과 그리스정교회당이 산재한다. 헬레니즘 시대에 알렉산드리아교구는 교리와 신학 연구가 가장 활발한 곳이었으며, 훗날 이단으로 몰린 그 유명한 아리우스파의 진원지다. 카르타고·베네치아 등 곳곳에 흔적을 남긴 지중해 유대인의 중요 거점이 알렉산드리아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아테네에서 이곳까지 직항 비행기편이 존재함은 거리상 이유 이외에 헬레니즘 문명권과의 오랜 내연 관계에서 비롯된다.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 이집트의 그리스 상인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출발해 인도까지 항해한 기록인 ‘에리트리아해 안내기’에 무지리스(인도 코친)가 등장한다. 무지리스에는 유대인촌이 지금도 존속한다. 후추와 여타 향신료, 금속공예품 등이 거래되고 있었고 많은 그리스 선원이 무역에 종사하고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페르시안 해양세계, 인도양 해양세계, 지중해 해양세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있었음을 잘 설명해준다.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의 이름을 붙인 신도시를 계획하고 건축가 디노크라테스에게 명령한 시점은 기원전 331년. 동방원정 중에 사망해 완성을 보진 못했지만 계승자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창건하고 수도로 삼는다. 기원전 80년 프톨레마이오스 10세 때, 로마 영향권에 들어간다. 카이사르가 이집트 내전에 개입, 클레오파트라가 옥타비아누스에게 반기를 든 이후 왕조가 멸망한다. 근년의 수중고고학 발굴로 클레오파트라궁이 도심 바로 앞쪽 수중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건축가는 격자형 구획으로 동서를 가로지르는 대로(大路), 궁전, 도서관이 딸린 박물관, 알렉산더 묘가 있는 소마 등의 거대 건축군을 축조했다. 그 도시에 파로스 등대와 도서관이라는 2개의 문명사적 상징이 장기지속 중이다.


기원전 280~247년 사이에 세워졌던 로도스섬(지금은 섬이 아닌)의 파로스 등대를 찾았다. 머무른 호텔에서 천천히 걸어갈 만한 거리. 마차를 탔는데 우리 돈 3000원쯤을 지불했다. 이집트에서는 이처럼 마차·노새 같은 가축 운송이 농촌에서만이 아니라 시내 관광교통용으로 많이 애용된다. 남유럽 지중해와 달리 북아프리카 지중해는 파도가 거칠다. 강한 파도 소리에서 북부 아프리카를 들이치던 거대한 역사의 격랑이 감지된다. 콰이트베이(Qaitbay)성은 파로스 등대가 무너진 곳에 술탄에 의해 1478년 세워졌다.


파로스 등대는 추정 높이 120~140m로 인공 구조물 가운데 최고의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 등대 출현은 지중해 해상교역에서 도시의 중요 위상을 상징한다. 마레오티스 호수의 하항(河港)이 수로를 통해 나일강과 홍해로 이어짐으로써 지중해와 근동국가들 교역이 가능해졌다. 로도스섬은 상업 활동의 핵심이 됐다. 그리스인의 지식과 동방국가의 역량이 융합되면서 눈부시게 발전했다. 알렉산드리아 국립박물관 전시물은 유별나게 그레코로만, 즉 그리스와 로마의 접합점을 강조하고 있었지만 정작 항해술·선박제조술 등에서 동방의 선진성을 빼놓고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라비아·인도·사하라·나일강 산물 모여파라오는 조선업 중심지인 이 도시를 거점으로 나일강과 지중해, 홍해의 해군 방어와 교역을 위한 선단을 보유했다. 아라비아의 이국적 향수와 인도양을 건너온 계피 같은 인디아 향료, 지중해를 통해 목재, 올리브기름, 포도주가 당도했다. 나일강 상류에는 내륙에서 금·상아·흑단은 물론 노예와 야생생물이 유입됐다. 서부의 카라반 길을 따라 말리광산의 암염을 포함해 사하라 사막의 물품이 들어왔다. 아프가니스탄산 청금석, 향기로운 레바논 삼나무, 유향과 몰약이 담긴 막대한 금액의 흑단 상자가 쌓이는 물류 집산지였다.


축적된 막대한 부를 어디에 이용했을까? 궁정, 박물관, 국가지원 학자, 서적, 계속 성장하는 도서관 유지 등 일상적인 비용이 왕실금고에 충당됐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문화융성의 강력한 후원자였음이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사원 건축과 복원이 이집트 전역에서 이뤄졌다. 오늘의 관광객이 보는 고대 이집트 유물이라 여기는 대부분이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역시 지중해와 동방의 문명교류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파피루스와 바다를 건넌 그레코로만의 문서들이 집적됐다. 도서관은 불에 타버렸어도 지적 지속성은 이어졌다. 철학자·수학자 등이 끊임없이 바다를 건너 선진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찾았다.


알렉산드리아 거주 그리스인 프톨레마이오스가 펴낸 8권의 지리학에 포함된 한 장의 세계지도에는 스리랑카에 이르는 ‘동방으로 바닷길’이 상세히 등장한다. 지도는 이 도시가 동서문명 교류의 중심이었음을 증명한다. 세계지도의 발명은 국가 해양력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훗날 바그다드의 압바스 왕조는 고대 그리스의 사라진 문헌을 대대적으로 번역 복원해 그리스 문명의 자양분을 흡수했다. 그러한 결과는 다시금 서양에 의해 번역돼 유럽 르네상스의 자양분으로 되살아나게 된다. 아랍문명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디미트리 구타스 예일대 교수는 “그리스 사상을 창조적이며 능동적으로 받아들였던 이슬람 사회의 지적 배경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알렉산드리아와 이집트 전역을 장악하게 되는 이슬람 왕조도 고립되지 않고 지중해 해양세계의 자양분을 빨아들이고 있었음을 주목한다.


이집트 정부는 어려운 나라 살림에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거창하게 짓고 지중해 지혜의 상징 아테네 여신과 나일강의 이시스신을 건축물 안에 모셨다. 우리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기라성 같은 철학자·수학자·극작가 흉상을 모신 ‘융·복합 아카이브’의 완성이다. 해양문명 실크로드 탐사가 그 끝자락이자 새 출발지인 ‘세계로 열린 항구도시’에 드디어 당도했다.


다음에는 ‘무역과 장인의 도시 몸바사’가 소개됩니다.


주강현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asiabad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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