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커버스토리] 안데스의 물, 태평양 바람이 키워 낸다…무르익는 와인왕국 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2면

| 칠레 산티아고 와이너리 탐방

기사 이미지

안데스는 태평양 쪽에 바투 붙은채 남미 대륙을 종단하는 산맥이다. 안데스를 넘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와인 풍미를 돋운다.

칠레는 남위 27~44도에 걸친 좁고 긴 나라다. 이 중에서 포도 경작은 혹서와 혹한을 피한 중부지역(남위 30~40도)에서 이뤄진다. 특히 남위 33도에 있는 수도 산티아고(Santiago) 주변에 포도밭이 집중돼 있다. week&의 칠레 와인 취재도 산티아고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마이포(Maipo) 밸리, 아콘카구아(Aconcagua) 밸리 등 산티아고에서 자동차로 1~2시간 거리에 있는 포도밭을 찾아다녔다. 칠레의 오묘한 자연이 빚은 와인의 향과 맛에 흠뻑 빠졌다.

기사 이미지

칠레 수도 산티아고는 눈이 내리지 않는 도시다. 하나 산티아고 시민은 사계절 내내 눈을 바라보며 산다. 남미 대륙의 척추 안데스 산맥 덕분이다. 6000m급 고봉 100여 개가 솟아 있는 산맥은 만년설을 머리에 얹고 있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칠레 전역에서 눈 덮인 안데스를 또렷이 볼 수 있다.

안데스 산맥의 최고봉이 아콘카구아산(6962m)이다. 산 줄기를 타고 150㎞ 뻗어 있는 구릉 지대를 아콘카구아 밸리라고 부르는데 그 중간에 아이콘 와이너리(Ikon winery)가 있다. 포도밭을 둘러보고 와인을 시음할 수 있어 해마다 와인 애호가 5000명이 방문한다.

아침 안개가 낀 아콘카구아 밸리 포도원.

기사 이미지

아이콘 와이너리는 칠레의 와인 명가 에라주리즈(Errazuriz)가 운영한다. 사실 칠레 와인의 절반은 저급 와인이다. 병이 아니라 무게에 따라 가격을 매기는 벌크와인(bulk wine)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라주리즈는 중·고급 와인에 주력한다. 연간 1000만ℓ의 와인을 만드는데, 이 중에서 약 45%가 소매가격 15달러(약 1만7000원) 이상의 프리미엄 와인이다. 아이콘 와이너리는 고품질의 칠레 와인을 경험할 수 있는 마땅한 장소라 할 수 있다.

기사 이미지

에라주리즈 와인 메이커 프란시스코 베팅.

아이콘 와이너리는 고개를 넘자 별안간 등장했다. 와이너리 주변으로 해발고도 200 ~ 600m의 완만한 능선을 따라 포도나무가 열을 맞추고 서 있었다. 마침 뿌연 안개가 끼어 포도밭이 자못 신비로워 보였다. 와인 메이커 프란시스코 베팅(47)이 안개를 두고 “와인의 풍미를 돋우는 천연 조미료”라며 운을 띄웠다.

“아콘카구아 밸리는 프랑스의 와인 생산지 보르도(Bordeaux)보다 평균 기온이 6~9도 높습니다. 더운 기후에 자란 포도로 와인을 만들면 달짝지근하기만 하지요. 향기로운 와인이 탄생하려면 차가움이 필요합니다. 아콘카구아 밸리에서는 안데스 산맥을 타고 내려온 서늘한 안개와 태평양에서 건너온 시원한 바람이 포도밭을 수시로 식혀 줍니다. 이곳의 포도가 달면서도 향기로운 이유입니다.”

기사 이미지

와인제조사 에라주리즈가 운영하는 아이콘 와이너리 와인 시음장.

포도밭 투어를 마치고 와이너리 건물에서 와인 ‘맥스 리제르바(Max reserva)’를 시음했다. 맥스 리제르바는 포도 품종별로 7종류가 생산되는데, 생산량의 3분의 1을 카베르네 쇼비뇽(Cabernet Sauvignon) 품종으로 빚은 레드 와인이 차지한다. ‘맥스 리제르바 카베르네 쇼비뇽’은 ‘칠레 와인’ 하면 떠오르는 맛과 향을 갖고 있었다. 짙은 자줏빛 와인은 과일향을 내며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고, 떨떠름한 질감을 입안에 남겼다.

기사 이미지

아이콘 와이너리에서 생산하는 프리미엄 와인 돈막시미아노와 맥스 리제르바.

가장 인상적인 와인은 또 다른 레드 와인 품종 카르메네르(Carmenere)로 빚은 ‘맥스 리제르바 카르메네르’였다. 카르메네르는 1860년 포도나무 역병인 필록세라가 유럽을 덮친 뒤 와인 종주국 프랑스에서 멸종된 품종이다. 그러나 칠레에는 카르메네르가 살아남았다. 안데스 산맥에 막혀 고립된 칠레에 전염병이 침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재 전 세계 카르메네르 와인의 90% 이상이 칠레에서 생산되고 있다.

맥스 리제르바 카르메네르는 포도 품종에 얽힌 사연만큼 맛도 흥미로웠다. 카베르네 쇼비뇽처럼 묵직했지만 과일향 대신 후추향이 났다. 맵싸한 고추를 먹고 난 것처럼 개운했다. 베팅은 “카르메네르는 칠레보다 한국에서 더 빛을 발할 와인”이라고 일러줬다. 한국을 방문했을 때 매콤한 한식과 카르메네르의 환상적인 음식 궁합을 경험했단다.

기사 이미지

고층 빌딩이 즐비한 산티아고 시내를 벗어나 남쪽을 향해 자동차로 1시간을 내달렸다. 현재 칠레에서 가장 주목받는 와인 산지 마이포 밸리로 향하기 위해서였다.

마이포 밸리의 너른 포도밭 곳곳에는 와인 제조사 간판이 걸려 있었다. 문외한에게도 익숙한 이름이었다. 칠레 와인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몬테스 알파(Montes Alpha)의 제조사 몬테스(Montes), 1초에 1병씩 팔린다는 와인 디아블로(Diablo)를 만드는 콘차 이 토로(Conch y Toro) 등이었다. 여행에 동행한 와인 해설사 프란시스카 로드리게즈(33)가 마이포 밸리를 두고 “칠레 와인 회사의 자존심 싸움이 벌어지는 각축장”이라고 표현했다.
 “마이포 밸리는 태평양에 붙어 있는 해안 산맥과 안데스 산맥 사이에 낀 평야 지대입니다. 사위가 산으로 둘린 분지와 같죠. 일교차가 커서 마이포 밸리에서 자란 포도나무는 열매가 단단합니다. 내로라하는 와인 회사가 마이포 밸리에서 최고급 와인을 만들어내는 비결이죠.”

기사 이미지

와인 디켄팅(decanting) 장면. 와인과 공기의 접촉을 늘려 향을 끌어올린다.

로드리게즈는 마이포 밸리가 19세기 말부터 최적의 와인 산지로 꼽혀 왔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마이포 밸리에서 고급 와인이 생산된 것은 30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이다. 70년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은 와인 회사가 소유하고 있던 마이포 밸리 땅을 몰수해 농민과 공기업에 분배했다. 73년 쿠테타로 집권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통치기간에도 와인 산업은 기를 펴지 못했다. 90년 피노체트가 물러난 뒤에야 마이포 밸리는 와인 생산지로 활기를 찾았다.

 에라주리즈도 92년에야 마이포 밸리에 비네도 채드윅(Vinedo Chadwick) 포도원을 만들고 경작을 시작했다. 마이포 밸리에 300㏊ 정도의 땅을 소유했던 에라주리즈는 아옌데 정권 때 토지 대부분을 빼앗기고 25㏊의 땅만 보유한 상태였다. 포도밭 관리자 조지 피게로아(49)가 “경작지가 작기 때문에 오히려 포도나무를 철저하게 관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사 이미지

폴로 경기장을 포도밭으로 조성한 비네도 채드윅.

기사 이미지

비네도 채드윅 포도원에 남아 있는 채드윅 가문 저택.

“이곳은 안데스 산맥에서 발원한 마이포 강이 흘렀던 자리입니다. 강물이 끌고 온 둥그스름한 돌이 퇴적된 땅이죠. 포도나무 뿌리가 자갈 사이로 깊게 내립니다. 이런 땅에서 자란 포도는 미네랄이 풍부한 와인으로 숙성됩니다.”

기사 이미지

비네도 채드윅

피게로아는 와인의 품질을 끌어올리기 위해 갖가지 실험을 진행한다고 덧붙였다. 포도나무 진드기를 잡아먹는 무당벌레를 방사하는가 하면, 포도나무 잎을 무성하게 길러 열매에 닿는 햇볕의 양을 조절하기도 한단다.

 이 포도밭에서 자란 카베르네 쇼비뇽을 수확해 빚은 와인이 칠레에서 최고급 와인으로 평가받는 ‘비네도 채드윅’이다. 한 병에 80만원이 넘는 와인으로, 우리나라에 수입되는 칠레 와인 가운데 가장 높은 몸값을 자랑한다.

에라주리즈의 회장 에드와르도 채드윅(55)은 가문의 이름을 건 와인을 들고 2004년 독일 베를린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심사단 40명을 초정해 와인 시음회를 개최했다. 76년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이 프랑스 와인을 꺾은 시음회, 이른바 ‘파리의 심판’을 본뜬 행사였다. 캘리포니아 와인이 그랬던 것처럼 칠레 와인의 대표주자 비네도 채드윅은 프랑스의 명주 샤토 마고(Chateau Margaux), 샤토 라피트 로쉴드(Chateau lafite Rothchild) 등을 누르고 베를린 시음회 1위를 거머쥐었다.

기사 이미지

에라주리즈의 회장 에드와르도 채드윅.

로버트 파커(69)와 함께 권위있는 와인 평론가로 꼽히는 제임스 서클링(58)은 올해 6월, 칠레 와인 중 최초로 비네도 채드위에 평점 100점 만점을 선사하기도 했다.

‘베를린의 심판’을 이룬 비네도 채드윅의 맛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포도원에서 와인을맛볼 기회를 얻었다. 작열하는 태양, 웅장한 안데스 산맥 등 칠레 자연의 강렬한 이미지와 닮았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와인은 레드 와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와인에 익숙치 않은 코에도 싱그러운 과일향이 느껴졌다.

● 여행정보

기사 이미지

칠레 와인 여행은 수도 산티아고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산티아고를 기점으로 북쪽에 아콘카구아 밸리, 남쪽에 마이포 밸리가 있다. 와인 제조사 에라주리즈(errazuriz.com)가 아콘카구아 밸리에서 아이콘 와이너리를 운영한다. 와이너리에서 일반 여행객을 위한 투어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와인 해설사와 함께 포도밭을 둘러보고, 와인 3종류를 시음할 수 있다. 1인 3만페소(5만원). 와인과 음식을 함께 즐기는 푸드 페어링 프로그램도 있다. 3코스 정찬에 와인이 곁들여진다. 1인 5만페소(8만3000원). 홈페이지로 예약을 받는다. 맥스 리제르바(3만원 대)와 비네도 채드윅(80만원 대)은 국내에서도 구입할 수 있다.

관련기사
▶ [커버스토리] 9년 내리 수입량 최대, 칠레 와인 그 묘한 매력

글=양보라 기자 bora@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