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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미의 취향저격 상하이] ⑨ 영화 ‘밀정’에 나온 그곳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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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보경로 청사가 있던 거리. 과거 프랑스 조계지였다.

최근 흥행몰이 중인 영화 ‘밀정’을 비롯해 ‘아나키스트(2000)’, ‘암살(2015)’ 등 의열단을 다룬 영화에는 빠짐없이 상하이가 등장한다. 상하이가 1920~30년대 독립운동의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임시정부와 의열단을 비롯한 무장 항일 단체들은 상하이를 중심으로 힘겨운 투쟁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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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는 전형적인 3층 스쿠먼 가옥이었다.

아마 영화를 본 뒤 상하이의 독립 운동 성지를 순례해야겠다 마음먹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상하이에서 선조들의 숭고한 발자취를 따라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의롭고 맹렬했던 독립투사들의 흔적은 이제 거의 사라지고 없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은 옛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大韓民國臨時政府舊址)와 루쉰 공원의 매정(梅亭)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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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요인과 손님들이 기거했던 침.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13일 상하이 조계지였던 김신부로(현 瑞金二路) 청사에서 출범했다. 중국과 한반도 각지에 산발한 임시정부를 통합했고,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 내무총장은 안창호, 경무국장은 김구를 선임했다. 헌법에 명시한 대로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은 나라이니, 지금의 대한민국은 상하이에서 탄생한 셈이다. 임시정부는 그 후로 프랑스 조계지 안에서 여러 차례 이전했지만, 현재 남아있는 곳은 보경로(현 馬當路) 청사 뿐이다. 보경로 청사는 1926년 7월부터 1932년 4월까지 임시정부가 가장 오랫동안 사용한 청사이자, 상하이에서 마지막으로 머문 청사이다. 이후 임시정부는 상하이 시대를 끝내고, 창사(長沙)로 이주한다. 중국과의 오랜 단교로, 보경로 청사 역시 영영 잊히고 버려질 뻔했지만, 1993년 철거 직전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도보 10분 거리가 바로 유명 관광지인 신톈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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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명소인 신톈디(新天地)에 왔다가 근처 보경로 청사에 들른 외국인 관광객들은 실망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리기도 한다. 전형적인 3층 스쿠먼(石庫門) 가옥 형태인 청사가 허름하고 볼품없어서다. 1층은 부엌, 2층은 집무실, 3층은 침실로 쓰였는데, 방이 달랑 4개 뿐이다. 한 나라의 살림이 이토록 작은 곳에서 꾸려졌다니 서글픔이 밀려왔다. 타국의 초라한 셋집에서 언제가 될지 모르는 독립을 위해 하루하루 싸워간 그분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가슴 한 켠이 뻐근해졌다.

3층은 임시정부의 역사를 일별할 수 있는 전시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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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임시정부는 거지꼴이고 장관은 돈이나 꾸러 다닌다”는 일본 밀정의 대사가 나오는데, 보경로 청사 시절 임시정부가 실제 그랬다. 당시 국무령으로 최고 수반이었던 김구 선생은 이곳 2층 집무실에서 ‘참담하고 고난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최대, 최후의 결심’을 하고 『백범일지』 상권을 썼다. 임시정부는 갈수록 커지는 일제의 위세와 극심한 재정난, 인재난으로 허덕이고 있었다. 상하이의 독립운동자 수는 수천명에서 수십명으로 줄었고, 청사 집세 30위안을 내지 못해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김구 스스로 자책하며 ‘고대광실이 걸인의 소굴이 된 형편’이라고 할 만큼 임시정부는 무정부 상태에 가까웠다.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 바로 이봉창, 윤봉길 두 의사의 의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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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공원 북쪽에 매헌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사당 ‘매정’이 있다.

이봉창 의사는 도쿄 거사에 실패했지만 윤봉길 의사는 상하이 거사를 성공했다. 고향이 충남 덕산인 윤 의사는 아내와 어린 아들을 두고 오로지 독립운동을 위해 혈혈단신으로 상하이에 왔다. 채소 장사를 하며 와신상담하던 그는 어느 날 김구를 찾아갔다. 일본이 중국과의 전쟁(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고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결심에서였다. 김구는 윤봉길 의사에게 어려운 제안을 꺼냈다. 전쟁 승리와 일왕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홍커우 공원에서 성대한 축하행사가 열리는데, 여기 참석한 고위인사들을 폭탄으로 저격하자는 것이었다. 윤봉길 의사는 망설임 없이 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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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윤봉길 의사가 의거했던 홍커우 공원은 현재 루쉰공원으로 바뀌었다.

윤봉길 의사가 홍커우 공원에서 던진 것은 도시락 폭탄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수통 폭탄도 함께 던졌다. 도시락 폭탄은 불발했고, 수통 폭탄은 터져서 상하이 거류민 단장을 비롯해 일본군 고위 인사 7명을 사살했다. 이 사건은 로이터통신 등에 보도되며 대한민국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임시정부는 정체된 활동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김구는 애꿎은 동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배후임을 밝혔다. 일본 경찰은 그를 잡는데 혈안이 되어 60만위안(현 200억원 상당)의 현상금을 걸었고, 결국 김구와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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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공원의 루신묘 앞 광장. 윤봉길 의사가 수통 폭탄으로 의거 곳이 바로 여기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장소는 현재의 루쉰공원 루쉰묘 앞 광장이다. 그를 기리는 사당 매정은 공원 북쪽에 있다. 규모는 작지만 윤봉길 의사의 삶과 의거 전후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한다. 윤봉길 의사는 의거 현장에서 검거돼 그해 12월19일 일본 가나자와 감옥에서 순국했다. 그의 나이 겨우 25살이었다. 그가 망명길에 오르기 전 썼다는 글을 보곤 한동안 먹먹함에 자리를 뜨지 못했다.

영화 ‘밀정’에 등장한 화려한 상하이 거리는 바로 난징동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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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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